우리는 복음을 생각하고, 알고, 이해하고, 외칩니다.

로마서의 서언: 자기소개와 인사말✤ 복음으로 서막을 열다.유례가 없는 로마서의 긴 송․수신부에서 바울은 복음과 예수 그리스도를 설명한다. 흔히 로마교회에 대하여 구면이 아닌 바울이 어떤 이유로 자신의 권위와 신뢰를 세우기 위해 이렇듯 긴 송․수신부를 작성하고 있는 것으로 본다. 어떤 이유에서 바울이 이 문단을 전형적인 여타 다른 편지들에 비해 길게 쓰고 있을 것이지만, 이유가 있다고 해서 그 내용을 간과하는 우를 범해서는 안 된다. 바울은 이후 교회사에서 등장하는 많은 신학적 논쟁을 비롯하여 각종 인문학에 이르기까지 주요한 핵심으로 자리하게 될 그 위대한 로마서의 서막을 열고 있다. 그리고 그 서막에서 바울은 ‘하나님’, ‘복음’,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 ‘믿음’, ‘은혜’라는 기독교에 있어서 한가운데에 위치하는 핵심 단어들을 망라하고 있다. 송․수신부로써는 본 단락이 매우 긴 편이지만, 문단으로는 고작 7절로 이루어진 한 문단에 불과하다. 서막을 여는 이 한 문단에서 단지 잇기만 하면 복음의 핵심 명제가 되는 저 단어들을 모두 사용하고 있는 것이 대단히 놀라우면서도 의미심장하다. 조금 긴 인사말 한마디에 복음에 있어서 하나도 첨가하거나 뺄 수 없는 저 단어들을 모두 말하고 있다는 것이 바울의 생각과 마음이 무엇으로 가득 차 있는지를 말해주는 듯도 하다.특히 바울은 ‘예수 그리스도(1절에서는 순서를 바꾸어 그리스도 예수라고 했다.)’를 3번 언급하고 있다. 그리고 인사말의 중심부에서 구약성경에 예언된 메시아와 하나님의 아들이 예수 그리스도라는 것을 밝히는 짧은 논증을 전개한다. 서신의 시작부터 바울이 기독론을 강하게 강조하고 있는 모습이다. 여기서 이미 기독교 교의의...
디바인트리 숲지기 2024.02.26 추천 0 조회 20
1. ‘πάσιν[파신](모든)’의 강조와 ‘άγίοις[하기오스](성도)’헬라어에서는 문법상 강조하고 싶은 단어를 가장 앞에 위치시킨다. 바울은 수신자인 ‘로마사람들에게’를 언급하며 1절부터 시작한 송․수신부를 끝맺고 있다. 그런데 7절에서 ‘모든(πάσιν)’을 강조하는 형태이다. 이를 통해 로마교회에 분열이나 파당이 있었음을 짐작해볼 수 있다. James D. G. Dunn, 「로마서(상)」, 「WBC」, 김철, 채천석 편, (서울: 솔로몬, 2003), 119. 이어서 바울은 그들을 ‘성도(άγίοις)’라고 칭하고 있는데, 성도라는 표현은 초대 교회 크리스천들을 말하는 다른 용법 중 하나이다. 바울은 분열이 있는 로마 공동체 구성원들을 ‘모든’과 ‘성도’라는 표현을 사용함으로 하나로 묶고 있다. 이미 고린도 교회에서 ‘바울파’, ‘아볼로파’ 따위로 파당을 지어 교회가 분열했던 일이 있었다. 교회를 분열하려는 세력은 그 세력이 사람이든 혹은 악한 인간의 마음이든 상관없이 보편적으로 다른 교회들에서도 얼마든지 일어날 수 있는 일이다. 따라서 바울은 여기서 자신의 서신을 받는 수신자를 ‘성도인 모든 로마사람’으로 강조함으로써 그들의 분열을 지적하는 것이다. 우리는 앞으로 로마서를 통해 바울이 어떻게 이 분열을 중재하는지 알게 될 것이다.2. ‘θεού πατρός[데우 파트로스](아버지 하나님)’자신이 믿고 있는 종교의 신을 아버지로 묘사하는 것은, 당시 그리스-로마 문화권에서는 익숙한 일이었다. 위와 같음, 122. 그리고 유대인들도 포로기 이후 지혜문학에서 하나님을 아버지로 이해하는 장면이 종종 등장한다. 특히 초기 크리스천들의 경우 하나님을 아버지로 여기는 것이 잘 확립되어 있었다. 왜냐하면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가르치신 기도인 주기도문에서 하나님을 아버지로 부르도록 하고 있기 때문이다. 눅 11:23. ‘χάρις ύμΐν καί ειρήνη[카리스 휘민 카이 에이레네](너희에게 은혜와 평강이)’이 표현은 바울 신학을 통해...
디바인트리 숲지기 2024.02.22 추천 0 조회 21
2차 세계대전 당시 독일 고백교회의 일원으로히틀러 암살에 가담했다는 이유로젊은 나이에 처형당한 '디트리히 본회퍼'그리스도의 '제자도'를 천명한 것으로잘 알려져 있다.그의 '의로워 보이는 삶' 때문에 사람들은 그의 주장을 쉽게 재고해보지 못하고 있다.그러나 본회퍼의 이론은 '모범설'에 기반한'행위주의'의 구원론을 천명한다.본회퍼의 글을 읽어보면,'제자도'라는 그럴듯한 용어에'구원'을 결부시키고 있음을 발견할 수 있다.그는 그리스도가 자신의 '제자'가 되는 조건으로'하나님의 나라'를 약속했다고 해석하면서그리스도의 제자도가 바로 그가 몸소 보이신'무저항의 비폭력 평화주의'라고 주장한다.본회퍼의 이러한 주장은카톨릭 교의학에서 '종교다원주의'를(좀 더 정확하게는 '포괄주의')근거지우는 예수 그리스도의 '모범설'에서 기인한다.알버트 슈바이처 박사가 주장하기도 했던'모범설'은 쉽게 말해 예수 그리스도가구원 받는 방법의 '모범'을 보이고자성육신 하신 분이라는 것이다.즉, 예수 그리스도가 우리의 죄를 대속하셨다거나오직 믿음으로 구원이 은혜로 주어진다는 것은'모범설'에 있어서 거부된다.결국 '무저항의 비폭력 평화주의'를 추구하는 이들은꼭 예수 그리스도를 알지 못한다고 하더라도예수 그리스도의 모범을 따르고 있는 것임으로구원이 있을 수 있게 된다고 본다.이 것이 바로 지금 '카톨릭'에서 교의로 삼고 있는'종교 포괄주의'의 입장이다.본회퍼는 개신교 목사이면서도자신이 처한 상황에서 '제자도'를 강조할 수 밖에 없었다.그러나 그는 그 스스로의 주장과 반대로'무저항의 비폭력 평화주의'를 따르지 못했다.그는 히틀러 암살에 암묵적으로 가담했고,이에 그는 처형당한다.만약 그가 가담했던 암살 계획이 성공했다면,그는 자신의 주장과 다른 행동에뭐라고 변명했을까?본회퍼와 같은 주장들이 한국 교회에분별력 없이 말해지고 있는 것은본회퍼의 글을 읽고도 그게 무슨 소린지 도무지 알지 못하는우매한 지도자들의 탓이다.그들이 읽어도 알지 못하는 것은복음을 모르기 때문이다.예수 그리스도는 우리에게 '제자도'를 말씀하지 않으셨다.예수 그리스도가 명령하신 '제자를 삼으라'는 명령은'십자가의 도'를 가르치고 전파하라는 의미이지'제자도'를 말씀하신게 아니다.예수...
복음 Insight 숲지기 2024.02.20 추천 0 조회 15
1. ‘έλάβομεν[엘라보멘](우리가 받았다)’헬라어 동사의 경우 주어를 포함한다. 이 단어의 경우 1인칭 복수형, 즉 ‘우리’라는 주어를 가진 동사로 쓰고 있다. 바울은 “우리가 사도의 직분을 받았다.”라고 말한다. 즉, 바울은 자신을 소개하는 이 단락에서 자신의 사도권이, 독단적인 주장이 아니라 ‘사도’라는 집단에 자신이 포함된다는 것으로 표현하고 있는 것이다. 바울의 이러한 표현은 그가 이미 ‘고린도 교회’나 ‘갈라디아 교회’에서 자신의 사도권을 공격받았던 적이 있었다는 사실에 기인한다.2. ‘ύπακοήν πίστεως[휘파코엔 피스테오스](믿음의 순종)’‘믿음의 순종’이라는 표현은 어떤 의미인가? 단순히 생각하기에 “사도라는 직분으로 부르심에 순종하였는데, 믿음을 가지고 순종했다.”라는 의미로 생각될 수 있다. 그러나 이는 여기서 ‘πίστεως[피스테오스](믿음의)’라는 단어가 소유격(~의)으로 쓰였다는 점을 간과하는 것이다. 바울은 순종과 믿음을 구분하여 “믿음을 가진 순종”이라거나 혹은 “믿음 이후 따르게 되는 순종”이라고 말하고 있지 않다. 바울은 “믿음의 순종”이라고 말하고 있다. 바울은 로마서 마지막 부분인 16장 26절에 이르러 다시 한번 ‘믿음의 순종’이라는 표현을 사용한다.소유격으로 어떤 단어를 수식하는 용례는 그 단어의 의미를 소유격 단어에 포함시키는 경우이다. 예를 들어보자. ‘인사’라는 단어는 안부를 전하는 몸짓이나 말을 일컫는다. ‘인사’를 ‘사랑’이라는 단어의 소유격으로 수식하면 ‘사랑의 인사’가 된다. 그러면 ‘사랑의 인사’는 사랑의 표현으로써 안부를 전하는 몸짓이나 말이라는 뜻이 된다. 다시 말해, ‘사랑의’라는 소유격 단어가 ‘인사’라는 단어의 의미를 형태로 취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다시 본문의 논의로 돌아가서, ‘믿음의 순종’은 어떤 의미가 되는가? 단지 ‘순종’이라는 단어의 의미는 “명령에 순순히 따른다.”라는 의미이다. 그런데 ‘믿음의 순종’은 믿음이 순순히 따르는 것을...
디바인트리 숲지기 2024.02.18 추천 0 조회 18
1. ‘υΐοΰ αύτου[휘우 아우투](그의 아들)’지시대명사 ‘αύτου[아우투]’는 2절과 동일하게 1절의 ‘하나님’을 지시하고 있다. 따라서 계속해서 ‘하나님의 복음’을 설명하는 가운데, ‘하나님의 아들’에 관한 이야기를 시작하는 것이다.헬라어에서 ‘아들’은 항상 혈통의 아들이라는 의미로 사용되지만은 않았다. ‘파생된’의 의미를 갖기도 했다. 왕권신수설에 따라 로마에서는 황제를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칭하기도 했고, 유대인들은 구약에서 천사들을 ‘하나님의 아들들’이라고 부르기도 했다.(창6:2, 4 / 신32:8 / 욥1:6-12 / 시29:1 / 시89:6 등) 그런데 ‘하나님의 아들’은 유대인들이 구약에서 예언된 ‘메시아(그리스도)’를 표현하는 말이기도 했다.(Craig S. Keener 외 3, 「IVP 성경 배경 주석: 신약」, 김세윤 역, (서울: IVP, 2010), 480.) 바울은 여기서 어떤 의미로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표현을 사용했는지 이어지는 두 개의 분사구를 통해 설명한다.2. ‘γενομένου[게노메누](오신)’ / ‘όρισθέντος[호리스덴토스](선포된)’3, 4절은 이 두 개의 분사구로 ‘하나님의 아들’을 설명한다. 먼저 ‘오신’이 이끄는 설명은 ‘다윗의 자손’이다. 이는 구약성경에서 메시아를 수식하는 전형적인 표현이다.(사11 / 렘23:5-6 / 렘33:14-18 / 겔34:23-31 / 겔37:24-28) ‘선포된’이 이끄는 설명은 ‘하나님의 아들’이다.여기서 ‘όρισθέντος[호리스덴토스]’라는 단어는 공표된, 선포된, 알려진, 공지된, 언급된, 결정된, 임명된, 제안된, 등의 뜻을 갖는다. 따라서 이 단어는 바울이 앞에 언급했던 ‘하나님의 아들’을 다시 지시함과 동시에 ‘다윗의 자손’으로서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불려왔던 바로 그 ‘하나님의 아들’을 지시하는 것이다. ‘호리스덴토스’의 이러한 용법과 유사한 국어의 표현으로 ‘이른바’가 있다.3. ‘έν δυνάμει κατά πνεύμα άγιωσύνης[엔 뒤나메이 카타 프뉴마 하기오쉬네스](능력 안에서 거룩의 영을 따라)’여기서 바울이 ‘능력’이라는 말을 사용하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가 구약성경에서 예언된 메시아임을 입증하는 주체가...
디바인트리 숲지기 2024.02.12 추천 0 조회 16
1. ‘하나님의 복음’에 대한 설명 시작바울은 1절에서 ‘하나님의 복음’이라는 표현으로 아포리아(의혹법)를 던졌다. 이제 아포리아를 해결하기 위해 2~4절까지 ‘하나님의 복음’을 설명한다. 정관사 ‘ό(호)’는 목적격 단수 형태를 띠고서, 바로 직전에 있는 1절의 목적절 ‘하나님의 복음’을 가리키는 지시대명사의 역할로 쓰이고 있다.2. ‘γραφαῖς ἁγίαις[그라파이스 하기아스](거룩한 문서)’‘γραφαῖς[그라파이스]’는 책, 서류를 뜻하는 단어 ‘γραφη[그라페]’의 복수형이다. 신약성경에서 이 단어는 50회 등장하는데, 유대인들과 크리스천들 사이에서 유대교 경전인 ‘구약성경’을 지칭한다.(James D. G. Dunn, 「로마서(상)」, 「WBC」, 김철, 채천석 편, (서울: 솔로몬, 2003), 107.) 그런데 바울은 이 단어에 ‘ἁγίαις[하기아스]’라는 형용사를 붙이고 있다. 바울은 다른 어디에서도 ‘γραφαῖς[그라파이스](구약성경)’ 뒤에 이 형용사를 쓴 적이 없다.(Douglas J, Moo, 「로마서」, 「NICNT」, 박문재 외 2인 편, 개정판 (서울: 솔로몬, 2022), 67.) 이는 ‘하나님의 복음’이 구약성경을 통해 예언된 것이라는 의미를 전달하려는 의도로 보인다. 즉, 예언서의 느낌을 강조하기 위해 ‘구약성경’에 ‘신성한’이라는 의미의 형용사를 붙인 것이다. ‘ἁγίαις[하기아스]’는 신성한, 결백한, 종교적인, 거룩한 이라는 의미를 갖는다. 따라서 여기서는 구약성경의 예언서 의미를 전달하기 위해 ‘거룩한’ 보다는 ‘신성한’으로 번역하는 것이 적절해 보인다.「생·크·림林 번역」로마서 1장 2절2 하나님의 복음은 하나님께서 선지자들을 통하여 신성한 구약성경에 미리 약속하신 것이라.
디바인트리 숲지기 2024.02.07 추천 0 조회 18
1. 긴 편지와 긴 인사말로마서는 총 7,114단어로 이루어진다. 1세기는 로마제국의 치세로 종이가 값쌌고, 로마제국에서 직접 운영하는 우편제도가 있었다. 그래서 편지를 주고받는 일이 흔했음에도 로마서의 분량은 흔치 않은 긴 편지이다. 또한 바울 서신중에서도 가장 확장된 양식을 보인다.1세기 그리스-로마 지역에서 일반 민중들이 주고받았던 서신을 살펴보면, 전형적인 형식의 인사말로 시작한다. 발신자를 주어로 쓰고 수신자를 여격으로 쓴 뒤 “문안하노라(χαίρειν)”를 붙이는 하나의 문장이 그것이다.(Douglas J, Moo, 「로마서」, 「NICNT」, 박문재 외 2인 편, 개정판 (서울: 솔로몬, 2022), 62.) 바울도 로마서를 제외한 다른 서신에서는 이러한 일반적인 인사말 형식을 취하고 있다. 그러나 로마서의 경우 인사말부를 대폭 확대하여 길게 쓰고 있다. 이에 대해 대략 다음과 같은 이유가 제시되고 있다. 그리고 아래 이유 중 일부 혹은 전부가 바울이 인사말을 길게 적고 있는 이유가 될 것이다.1) 로마서 1장 13절에서 바울이 밝히고 있듯이 로마교회는 바울이 로마서를 쓰기 전까지 아직 한 번도 방문한 적이 없는 교회이다. 로마서를 기록할 당시 이방교회에서 바울의 사도적 권위는 이미 확고한 위치에 있었지만, 한 번도 방문한 적이 없는 교회이기에 바울은 긴 자기소개를 건네고 있다. 자신이 개척했던 고린도교회에서도 바울의 사도적 권위를 중상하는 세력이 번지기도 했다. 따라서 한번도 방문한 일이 없는 로마교회에 서신을 보내면서 바울은 자신의 사도적 권위를 글로써 드러내야 할 필요가 있었다. 이러한 맥락 가운데 바울은 유례없는 긴 서두를 열고 있다.2) 바울은 15장 28절에서 자신의 계획을 밝히고 있다. 그 계획에...
디바인트리 숲지기 2024.01.30 추천 0 조회 20
1. 장, 절에 대하여…….우리가 지금 보는 성경은 장과 절로 구분되어 있다. 그러나 처음 신약성경이 쓰인 다음부터 천년이 넘도록 교회는 장과 절이 없는 성경을 읽었다. 성경의 장이 구분되기 시작한 것은 무려 13세기에 이르러서이다. 1205년 파리 대학 교수 출신으로 나중에 영국 캔터베리 대주교가 된 스티브 랑톤(Stephen Lengton, 1150~1228)이 창안하여 라틴어 성경을 필사하면서 처음으로 성경에 장을 도입했다. 절이 구분되기 시작한 것은 그로부터 300년이 더 지난 뒤였다. 15세기 인쇄업자였던 로베르 엔티엔((Robert Estienne, 1503~1559)이 1551년에 처음으로 성경에 절을 구분하여 신약성경을 출판했다. 이후부터 성경을 인쇄할 때, 장과 절을 구분하여 인쇄하는 것이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는 것이다.이처럼 애초에 성경의 장과 절을 구분한 것은 어떤 문맥적 요소를 고려한 것이 아니었다. 단지 책에서 특정 위치를 찾기 쉽게 하기 위한 중세 출판업의 유행에 근거하고 있을 뿐이다. 그러나 성경의 장, 절 구분은 성경 원전이 가지고 있었던 산문적인 성격을 잃어버리게 했다. 또한 성경의 장, 절은 라틴어 성경을 모본으로 구분된 것이기에, 헬라어 성경에 비추어 봤을 때는 절이 문장을 나누어 버리는 일이 심심치 않게 벌어진다. 애석하게도 장, 절의 구분으로 인해 발생하는 이러한 작은 오류들이 어떤 경우에는 문맥의 의미를 왜곡시키기도 한다.따라서 이 프로젝트에서는 기본적으로 성경의 장, 절을 구분하되, 원전에서 드러나는 산문적 특성과 헬라어의 문장 종결 부호를 기준으로 번역을 진행할 것이다.2. 문단 나눔에 대하여…….성경의 장, 절이 나뉘어 인쇄출판 되면서 원전에 있는 문단 나눔이 더 이상 표기되지 않게...
디바인트리 숲지기 2024.01.24 추천 0 조회 20
이 질문에는사람들이 간과하는 '조건'이 따라붙어야 한다.'필요한가?' '필요하지 않은가?'어디에 있어서 필요하다는 것인가??만약 이 질문이'구원'이나 '하나님과의 관계'에 있어서순종이 필요하지 않냐고 묻는 것이라면,당연코 필요하지 않다!'구원'이나 '하나님과의 관계'에서우리를 끊어낼 수 있는 그 어떤 것도존재할 수 없다.누가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으리요 환난이나 곤고나 박해나 기근이나 적신이나 위험이나 칼이랴(로마서 8장 35절)그런데 이 질문이'이 땅에서의 삶'이나 '다른 이들과의 관계'에 있어서라는 조건부로 묻는 것이라면,그건 당연히 필요한 것이 아닌가?크리스천이 되면 어디 공중에 떠서 혼자 사는가?크리스천이 되는 것은 내 '존재'의 '의미'가 바뀌는 것이지,내 '상황'과 '세상'이 바뀌는 게 아니지 않는가?크리스천이 된 이후에도 여전히 우리 앞에백지장 같은 '인생'이란 게 펼쳐져 있다.그리고 '인생'이란 것에는수많은 '선택', 타인들과의 '관계'가포함되어 있다.크리스천이 '인생'에서수많은 '고민'과 '선택', '관계' 등을 마주할 때마다크리스천은 어떤 기준과 관점으로 그것들을 마주해야 하는가?'성경'의 교훈들은 그런 의미에서 크리스천에게 좋은 '경전'이 될 수 있다.또한 그런 의미에서 크리스천은하나님 말씀에 '순종'하는 것윤리적인 삶을 고민하고 실천하는 것등이 필요하다.당연하지 않은가?그러나!매우 당연하고 상식적인 것을교묘하게 틈타서복음과 '순종' 혹은 '윤리적인 삶'을연결 지으려는 모든 시도를분별해야 한다!부디 분별해야 한다!
복음 Insight 숲지기 2024.01.21 추천 0 조회 18
구글에서"복음은 무엇인가?"라고 검색하면,온통 '신천지'와 '하나님의 교회' 혹은 '구원파'등의사이비 교파들의 홈페이지로 연결된다.대체 한국의 수많은 교회에서는뭘 하고 있는 것인가?          복음은 '기쁜 소식'이라고 풀어 쓸 수 있다.기독교에서 말하는 '기쁜 소식', 즉 복음은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죄를 속량해주셨다는 '소식'이다.          복음은 '부활'의 소식이 아니다.복음은 '윤리적 진보'의 소식도 아니다.복음은 '진정한 사회 변혁'의 소식도 아니다.복음은 '악의 세력에 대한 승리(?)'의 소식도 아니다.          혹여나 복음이라는 단어에잡다한 의미들을 너저분하게 붙여놓고 있다면,그건 전부다 '장삿속'이니허리띠를 풀어 잡다한 의미들을 제거해 버리라!          복음은 결코 복잡한 것이 아니다.유사 이래 가장 '기쁜 소식'그것은 인간인 나를 하나님께서 '구원'해주신다는 '소식'이다.기독교의 모든 '수식어'들은이 단순한 한 문장을 '설명'하는 것에 불과하지결단코 복음에 이 문장을 넘어서 더 '첨언'하는 것이어서는안된다.          인간 실존에서 '죽음'보다 더 큰 문제는 없다.모든 문제는 '죽음'과 함께 끝난다.좀 더 논리적으로는'존재의 끝'은 '존재'에 붙어있는 모든 문제도함께 종결시킨다는 의미이다.'존재'하지 않으면 '문제'는 없다.     그렇다면, 이 죽음의 문제가 해결되지 않는 이상다른 그 어떤 문제가 해결된다고 해도그것은 궁극적이고 영원한 의미에서 '기쁜 소식(복음)'이 될 수 없다.          이 세계에 '기아'가 사라졌다는 소식은'기쁜 소식'이겠지만,그래서 인간에게 '고통'이 사라지는가?     혹은 '윤리적 악'이 사라진다면?'자연재해'로부터 완벽히 안전해진다면?모두가 노동하지 않고도모든 것을 누리며 살 수 있는 세계가 된다면?그래서 인간에게 '고통'이나 '문제'가 완벽히 사라졌는가?     여전히 '죽음' 혹은 '존재의 끝' 혹은 '유한성'이떡 하니 인간 근원에 자리 잡고 있다.'영원히 사는 삶', '하나님 나라에서의 삶'이보장되지 않는다면, 다른 그 어떤 문제의 해결이 났다는 소식도결단코 자랑스럽게 영원하고 궁극적인 '복음'이라고말할 수 없다.     복음우리가 진리라고 믿고우리의 인생을 다해아니 역사 이래로이것이야말로 '기쁜 소식'이다!라고 말할...
복음 Insight 숲지기 2024.01.21 추천 0 조회 1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