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복음을 생각하고, 알고, 이해하고, 외칩니다.

로마서의 서언: 로마교회에 방문하고 싶어 하는 바울의 열망✤ 바울이 로마교회에 방문하여서 하려던 일바울은 로마교회의 성도들을 만나고 싶은 자신의 마음, 그리고 자신이 그토록 로마에 가고자 애썼던 일을 고백한다. 바울의 이 고백은 번번이 길이 막혀 로마에 가지 못했던 그의 대단히 아쉬운 마음을 잘 표현하고 있다. 바울은 로마교회에서 무엇을 하고 싶었던 것일까? 그는 본문을 통해 자신이 하려던 것을 밝히고 있다. 11절에서 바울은 “진실로 내가 너희 보기를 간절히 원하는 것은…”이라는 말로 그 설명을 시작한다. 이어서 그는 “너희에게 어떤 영적인 능력을 나눠 주어 너희를 굳건하게 하고 싶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그리고 12절에서 바울은 궁극적인 목적을 덧붙인다. 그것은 “너희와 내가 마찬가지로 가진 이 믿음에 함께 위로를 받으려 함”이다. 13절에서는 한가지 이유를 더 언급하는데, “다른 지역에서와 마찬가지로 너희에게서도 어떤 열매를 거두려 하였노라.”가 그것이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15절에서 그가 로마에서 하고 싶었던 일이 “로마에 있는 너희에게도 복음 전하는 것”이었음을 말한다. 정리하자면, 바울이 본문에서 말하는 로마에 방문하고자 했던 목적은 다음과 같다.바울이 로마에 방문하여서 하고 싶었던 일(행동)과 예상했던 결과(목적)행동결과어떤 영적인 능력을 나누어 주는 것너희가 굳건하게 됨너희와 내가 믿음을 마찬가지로 하는 것믿음에 위로를 받게 됨복음을 전하는 것어떤 열매를 거두게 됨로마에 가서 바울이 하고 싶었던 일을 순서대로 하면 바울이 나열했던 것의 역순이다. 일반 바울은 먼저 복음을 전했을 것이다. 그렇게 함으로 로마교회의 성도들과 바울의 믿음을 일치시켰을 것이다. 그리고 바울은 안수를 통해 어떤 영적인 능력을 나누어...
디바인트리 숲지기 2024.04.27 추천 0 조회 21
'축도'는 목사님만 할 수 있나요?흔히 교회에서 예배 후에 하는 '축복기도'인 '축도'는목사님들만 할 수 있는 것이 관행처럼 되어있다.그래서 전도사가 집례한 예배의 경우 '주기도문'으로 끝맺는다.그러나 이는 어디까지나 '관행'에 불과하다.실제로 복음주의 신학의 입장에서는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거듭난 '모든' 성도가'왕 같은 제사장'의 신분을 갖는다.이를 종교개혁의 용어로 '전신자 제사장의 원리'라고 한다.'목사', '권사', '장로', '집사', '전도사' 이러한 교회의 '직분'은 어디까지나공동체적 '역할'을 부여하는 '직책'일 뿐,'신분'이나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특별한 권리가 아니다.거듭난 신자라면,목사든 평신도든 모두 성부 성자 성령의 이름으로축도할 수 있는 하늘로부터의 '권리'가 있다.거듭난 신자라면, 누구든지성만찬을 집례할 수 있고, 세례를 줄 수도 있다!하나님으로부터 오는 그 어떤 '축복'이라도'매개'를 따져가면서 오지 않는다.다시말해, 매개자가 자격이 없는 탓에, 올 축복이 안오거나 하는 그딴 일은 없다.대체 하나님이 누구이시기에 '매개자' 탓에 자신이 줄 축복을 못주거나 하시겠는가??도구를 탓하는 것은 서툰 무당들이나 하는 짓이다.하나님은 심지어 '무당'을 통해서도, '당나귀'를 통해서도그 전달하고자 하시는 뜻을 전달하신다.
복음 Insight 숲지기 2024.04.21 추천 0 조회 16
1. ‘κατ’ έμέ πρόθυμον[카타 에메 프로뒤몬](할 수 있는 대로)’‘πρόθυμον[프로뒤몬]’이라는 단어는 ‘심령이 지향하는’, ‘본성적으로 추구하는(경향)’, ‘자발적인’, ‘간절히 원하는’, ‘마음의 준비가 되어 있는’ 등으로 번역할 수 있는 단어다. 예수님께서 붙잡히시던 날 겟세마네 동산에서 기도하실 적에 함께 깨어있지 못하는 제자들을 향해 “…마음은 원이로되 육신이 약하도다(마26:41/막14:38)”라고 말씀하셨다. 이때 “마음은 원이로되”에서 쓰였던 단어가 바로 ‘πρόθυμον[프로뒤몬]’이다. 그러니까 이 단어는 어떤 외적인 제약으로 인하여 원하는 대로 하지 못하지만, 마음으로는 간절히 원하는 격정적인 마음을 표현할 때 사용되고 있다.2. ‘εύαγγελίσασθαι[유앙겔리사스타이](좋은 소식을 전하다)’서신을 시작하면서 1장 1절에서 바울은 자신을 “하나님의 복음을 위하여 택정 된 자”라고 소개했다. 여기서 바울은 “εύαγγέλιον[유앙겔리온](좋은 소식)”이라는 ‘복음’의 명사형 단어를 사용했다. 이제 로마서의 서론부를 종결하는 시점에서 바울은 ‘εύαγγελίσασθαι[유앙겔리사스타이](좋은 소식을 전하다)’라는 ‘복음을 전하다.’의 의미의 동사를 사용한다. 서론 전체에서 바울은 자신에 대한 정체성을 복음에 대한 정의와 복음을 전하는 사도로 확고히 전달하고 있다.바울이 로마교회에 전하고 싶어 하는 ‘복음’이 무엇인지에 대한 일련의 논쟁들이 있다.(1) 바울이 기독교 신앙이 없는 사람들에게 회심을 목적으로 하는 최초의 복음 전파를 이야기하는 것으로 ‘εύαγγελίσασθαι[유앙겔리사스타이](좋은 소식을 전하다)’라는 동사를 사용한다는 견해가 있다.(James D. G. Dunn, 「로마서(상)」, 「WBC」, 김철, 채천석 편, (서울: 솔로몬, 2003), 141.) 따라서 바울이 로마에 있는 미전도 로마인들을 대상으로 복음을 전하는 것을 말한다는 견해가 있다. 그러나 바울은 ‘복음’이라는 말을 단순히 회심을 위해 받아들이는 최초의 명제로만 제한하여 사용하지 않고, 자신의 목회 사역과 자신의 기독론 전체를 아우르는 표현으로 사용할 때가...
디바인트리 숲지기 2024.04.18 추천 0 조회 15
1. 서언의 마지막 문장바울은 유난히 길었던 서언의 인사말 문단을 마무리 지으면서 마지막 문장을 쓰고 있다. 13절과 연결 접속사가 없고, 대문자로 시작하면서 바울은 마지막 문장인 14, 15절을 강조하고 있다.2. ‘Έλλησίν καί βαρβάροις[헬레신 카이 바르바로이스](헬라인과 야만인)’바울이 두 집단으로 구분하여 표현하고 있는 인종 표현이 어떤 사람들을 지시하는지에 대한 다양한 추측들이 있다.(Douglas J. Moo, 「로마서」, 「NICNT」, 박문재 외 2인 편, 개정판 (서울: 솔로몬, 2022), 97.) 바울은 이후 로마서에서 “헬라인과 유대인”이라는 인종적 표현을 자주 사용한다.(롬1:16 / 2:9, 10 / 3:9 / 10:12) 그러나 여기서는 유대인 대신에 야만인이라는 표현을 사용하고 있다. ‘βαρβάροις[바르바로이스]’라는 단어의 직역 의미는 ‘알아듣기 힘든 말로 말하는’이라는 뜻이다. 이는 외국어로 말하는 외국인을 지칭할 때 사용하는 말이다.알렉산더 대왕이 정복전쟁을 벌인 이후 기원전 323년부터 로마제국에 의해 그리스가 멸망하는 기원전 30년까지를 문화적으로 ‘헬레니즘 시대’라고 한다. 헬레니즘 시대에 헬라어를 구사하는 헬라문화권 사람들은 매우 보편적으로 문화우월주의를 가지고 있었다. 그들은 헬라어를 사용하지 않는 외국인들(βαρβάροις)을 미개인이나 야만인으로 취급했다. 그들의 이러한 문화우월주의 인식은 그리스 제국의 통치를 정당화하고 있었다. 그래서 그들에게는 헬라문화의 우월주의가 당연한 것으로 여겨졌다. 로마제국이 그리스를 멸망시키고 새로운 시대가 열렸음에도 로마제국은 헬레니즘의 문화우월주의를 적극적으로 파기하지 않았다. 오히려 로마제국은 헬레니즘 시대의 스토아 사상 등 문화적 가치를 인정하고 적극적으로 활용하였다. 따라서 여전히 외국인들(βαρβάροις)에 대한 헬라인들의 문화적 우월감은 유지되고 있었다. 그러나 한편으로 로마의 문화통치는 다양한 민족들의 종교적, 문화적 사상들을 적극적으로 인정해주고 있었다. 1세기 헬라문화권의...
디바인트리 숲지기 2024.04.11 추천 0 조회 16
1. ‘ού θέλω1 δέ ύμάς άγνοεϊν[우 델로 데 휘마스 아그노에인](너희가 모르기를 원치 아니한다)’이 표현은 바울이 독자의 이목을 집중시키고 공개적으로 어떤 사실을 알리고자 할 때 자주 사용되는 표현이다.(바울이 이와 같거나 비슷한 식의 표현을 하는 곳 : 롬11:25 / 고전10:1 / 고전12:1 / 고후1:8 / 살전4:13)2. ‘άδελφοί[아델포이](형제들아)’이 표현은 반드시 육신의 혈육에게뿐만 아니라 형제애(Brotherhood)를 가지고 있는 다양한 범위에서 사용되었다. 종교적으로 묶인 구성원, 민족적 구성원, 성직자 간에, 상업적인 조합 간에 동료를 지칭하는 말로 사용되던 말이다. 바울은 로마서에서만 18번 이 표현을 사용하고 있고, 그의 다른 서신에서도 자주 이 표현을 사용한다. 바울이 이 표현을 사용할 때의 대상은 항상 일정하게 특정되고 있지는 않고, 문맥상 유대인, 크리스천, 사도, 공동 송신자 등으로 달라진다. 한가지 특기할 점은 바울이 그리스도와 크리스천 사이의 형제 됨을 신학적으로 전개한다는 것이다. 바울은 크리스천이 하나님의 자녀가 되고 그리스도가 맏아들로서 우리들의 맏형이 된다는 신학적 주장을 전개한다.(롬8:29 / 골1:18 / 갈4:6-7)3. 로마에 가고자 하는 시도가 번번이 막힌 이유바울은 로마에 여러 번 가고자 시도했으나 길이 막혔다고 말한다. 바울이 강조 용법(모르기를 원하지 않는다.)을 써서 이 사실을 전달하고 있는 것은 그가 단지 인사치레로 이 말을 하는 것이 아니라 실제로 로마에 가기 위해 여러 번 시도했었음을 말해준다. 또한 바울은 15장 22절에서 이 사실을 다시 한번 언급한다. 그렇다면 바울의 로마로 가려는 시도는 왜 번번이 막혔던 것일까? 이에 대한 학자들의 추측은 이렇다.데살로니가전서 2장 18절에서...
디바인트리 숲지기 2024.04.02 추천 0 조회 16
1. ‘τούτο δέ έστιν[투토 데 에스틴](그러나 이것은 ~이라)’이 표현은 신약 전체에서 유일하게 여기서만 쓰인다.(Douglas J. Moo, 「로마서」, 「NICNT」, 박문재 외 2인 편, 개정판 (서울: 솔로몬, 2022), 94.) 이 표현은 앞서 한 말에 함의된 진짜 의미를 설명하고자 할 때 사용하는 표현이다.(J. B. Lightfoot, 「Notes on the Epistles of St. Paul from Unpublished Commentaries」, (London: MacMillan and Co, 1895), 248.) 국어에서 이런 식의 표현으로 “사실은….”이라는 표현이 있다. 바울은 11절에서 다소 모호한 표현을 사용한 것에 대한 설명을 덧붙이고자 하지만, 사실 그러한 표현은 바울도 정말 어떤 능력이 나타나게 될지 알 수 없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바울은 어떤 식으로든 나타나게 될 성령의 역사가 결국 어떤 궁극적인 결과를 주게 될지에 대한 설명을 여기 12절에서 덧붙이고자 하는 것이다.2. ‘διὰ τῆς ἐν ἀλλήλοις πίστεως[디아 테스 엔 알레로이스 피스테오스](피차에 믿음을 통하여)’일반적으로 ‘διὰ[디아](~통하여)’라는 전치사가 이끄는 이 구문을 위로의 수단으로 해석한다. 다시 말해, 바울이 여기서 믿음을 통한 위로가 목적이라고 말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해석은 문맥상 적절하지 않다. 단지 위로를 얻으려 한다는 바울의 말에 따르는 수식으로 ‘믿음을 통하여’라고 본다면, 바울은 왜 믿음을 통한 위로를 말하고 있는가? 12절에서 바울은 11절을 설명하고 있다. 11절에서 바울은 성령의 능력을 나누어주어 굳건하게 하려는 것을 밝혔다. 그리고 이어지는 12절의 설명에서 그것은 위로를 얻으려 하는 목적이라는 것이다. 그렇다면 그 위로는 당연히 11절에서 언급했던 ‘성령의 능력’으로부터 주어지는 위로여야 한다. 그런데 돌연...
디바인트리 숲지기 2024.03.30 추천 0 조회 15
하나님의 나라가 지금 여기 임한다는 것은지금 여기의 '상황'과 '사회'를윤리적으로 변혁시키라는 뜻인가?먼저 하나님의 나라를 생각할 때하나님의 명령에 복종하는 자들의 나라를쉽게 떠올리는 경우를 자주 본다.그리고하나님은 자신의지고한 뜻에 따라무지한 우리에게 명령하시고거기에 복종하는 것이 나와 하나님께 가장 좋은 길이 된다고 생각한다.이는 하나님을 '가스라이팅'하는 '사이코패스'로 생각하는 것과 다르지 않다.많은 사람들이 이를 간파하지 못한다.하나님께 순종하지 않아서 나에게 '나쁜'결과가 일어나는가?그런 가스라이팅은 '무당'들이 하는 짓거리다.무수히 많은 '인과'들 속에서 우리의 인생에 어떤 일이 발생한다해도그것은 결코 '최종 결과'일 수 없다.동양에서는 인생사 새옹지마라 했고, 서양에서 인생은 비스캣 상자라고 했다.우리의 하나님은 우리를 인격적으로 대하시며늘 함께 하시는 인자하시고 건강하신 아버지 이시지,자신의 명령에 복종을 강요하는가부장적이고 자존감 낮은 아버지가 아니시다.하나님의 나라는나를 사랑하셔서 독생자를 죽기까지 내어주신그런 하나님께서자신의 모든 것을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나를 위해 내어주시는그런 나라를 말한다.하나님의 나라가 지금 여기 임한다는 것은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그런 하나님과 '화목'하고'자녀'가 되어 그런 하나님의 '복지'를 누리는 '주권'을 가진다는 것을 말한다.하나님의 나라에서 우리에게는 '의무'는 없고 오직 '권리'만이 존재한다.왜냐하면 모든 '의무'를 예수 그리스도께서 감당하셨기 때문이다.바로 그렇기 때문에 예수 그리스도께서 하나님 나라에 들어올 자들을'구별', 즉 '판단' 혹은 '심판'하시는 분이 되실 수 있는 것이다.만약 거기에 있는 우리에게도 '의무'가 주어져야 한다면,우리도 그 나라의 일원을 선택하는데 일면의 '주주'역할을 받아야만 한다.부디, 하나님을 '가스라이팅'하는 사이코패스로 생각하지 말라!하나님은 우리에게 바라는 것이 아무것도 없으시다.하나님은 오직 우리에게 주고자 하는 것만 있으시다.하나님의 사랑인 '아가페'는오직 줄 수만 있고받기를 원하지 않는 사랑이다.
복음 Insight 숲지기 2024.03.20 추천 0 조회 15
1. ‘τι χάρισμα πνευματικόν[티 카리스마 프뉴마티콘](어떤 영적인 은사)’바울은 로마교회에 가기를 원하는 이유로 ‘어떤 영적인 은사’를 나누어주려 함이라고 밝힌다. 그리고 그 목적은 “너희를 견고하게 만들기 위하여”임을 밝힌다. 바울은 ‘어떤 영적인 은사’가 구체적으로 무엇인지는 언급하지 않는다. 그러나 우리는 앞서 바울이 예루살렘의 거절과 이방인의 충만한 수를 반비례 관계로 생각하여, 예루살렘의 거절이 이방인에게 충만한 복을 가져다줄 것으로 생각했다는 점을 살펴보았다. 로마서 15장 27절에서 바울은 이방인이 예루살렘 유대인들을 위해 연보 한 근거를 다음과 같이 말한다. “이방인들이 그들의 영적인 것을 나눠 가졌으면 육적인 것으로 그들을 섬기는 것이 마땅하니라” 여기서 ‘영적인’으로 번역된 단어도 역시 ‘πνευματικόν[프뉴마티콘](영적인)’이다. 이어 15장 28~29절에서 바울은 예루살렘에 들러 어떤 일을 마치고 로마교회로 갈 터인데, 그때 “그리스도의 충만한 복을 가지고 갈 줄을 아노라”라고 말한다. 바울은 예루살렘에서의 어떤 일로 말미암아 로마교회를 향할 때 충만한 복을 가지고 가게 될 것이라고 말하는 것이다. 그것은 지금 예루살렘의 유대인들을 위해 연보 한 이방인들이 나눠 가진, ‘πνευματικόν[프뉴마티콘](영적인)’과 대칭을 이룬다. 따라서 바울이 여기 1장 11절에서 말하고 있는 ‘어떤 영적인 은사’는 바울의 이방인 선교를 통해 이방인들에게 나타난 성령의 능력을 지칭한다. 또한 바울이 예루살렘과 로마행을 작정했던 시점인 사도행전 19장을 보면, 바울을 통해 이방 지역의 ‘제자들’에게 성령 세례가 임하여 능력이 나타나고, 바울의 손수건만 얹어도 능력이 나타나던 직후였음을 알 수 있다. 바울은 이방인 중에 일어나는 이러한 역사가 예루살렘의 거절과 관련 있다고 생각했고, 이제 예루살렘에서 “이 일”을...
디바인트리 숲지기 2024.03.20 추천 0 조회 13
1. ‘γάρ[가르](접속사)’헬라어 문법에서 접속사는 항상 그 접속사가 이끄는 문장의 첫 단어 뒤에 위치한다. 이 접속사의 가장 일반적인 용법은 앞에 나온 내용의 ‘이유’를 이야기할 때 사용되는 접속사다. 이 일반적인 용법의 경우 ‘왜냐하면’, ‘~로써’, ‘~때문에’, ‘~인 까닭에’ 등으로 번역될 수 있다.(James Strong, 「헬라어 스트롱사전」, γάρ.) 그러나 이 접속사가 항상 그런 식으로만 사용되는 것은 아니다. 이 접속사는 매우 넓은 의미에서 단순히 문장과 문장을 이어주는 접속사로 사용되고 있다. 특히 바울에게 있어서는 더욱 그렇다.이제 로마서에서 본격적으로 ‘γάρ[가르](접속사)’가 사용되기 시작한다. 바울은 이 접속사를 그의 서신 전반에 걸쳐 사용하고 있는데, 로마서에서만 130번 등장하고, 고린도전서 99번, 갈라디아서 34번 등 그의 다른 서신에서도 자주 사용되고 있다. 그러나 바울이 이 접속사를 사용할 때마다 이 접속사의 의미를 무엇으로 특징짓기 어렵다는 것이 문제가 된다. 쉽게 말해 바울이 ‘γάρ[가르](접속사)’를 너무 자주 반복해서 남용하고 있다는 말이다. 그래서 바울의 신학을 소위 “가르(γάρ) 신학”이라고 하기도 한다. 바울은 왜 이 접속사를 이토록 남용하고 있는가?학자들은 바울의 말버릇을 서신의 대필자가 그대로 받아 적은 것으로 추측한다. 바울 서신을 살펴보면, 바울은 송․수신부에서 송신자를 복수로 칭하는 경우가 많다. 바울이 혼자서 서신을 작성하고 있다면, 송신자를 단수로 “나”라고 칭해야 한다.로마의 치세 아래에 우편 시스템이 마련된 이후에도 그리스-로마 사회의 문맹률은 대략 90~95%에 달했다. 문맹률이 높은 사회에서 늘 그랬듯 당시에도 마을이나 공동체마다 편지를 대필해주거나 글을 읽어주는 사람들이 있었다. 꼭 글을 몰라서가 아니라 할지라도 신분이 높거나, 나이가...
디바인트리 숲지기 2024.03.15 추천 0 조회 15
1. ‘Πρώτον[프로톤](첫째로)’바울은 새로운 문단을 ‘첫째로(first)’라는 말로 시작한다. 그러나 이어지는 ‘둘째로’ 혹은 ‘다음으로’는 없다. 이러한 사례는 로마서 3장 2절과 고린도전서 11장 18절에도 등장한다. 바울은 ‘둘째로’ 혹은 ‘다음으로’ 없이 ‘첫째로’로 시작하는 문장을 사용한다.(James D. G. Dunn, 「로마서(상)」, 「WBC」, 김철, 채천석 편, (서울: 솔로몬, 2003), 90.)사전적으로 이 단어는 ‘(무엇보다 먼저 앞서는) 첫째’라는 의미다.(Walter Bauer, 「Greek-English Lexicon of the New Testament and Other Early Christian, 3rd Ed. Bauer(바우어 헬라어 사전 BDAG)」, πρώτον.) 따라서 바울은 여기서 독자의 주의를 집중시키는 한편, 뒤에 이어지는 자신의 감사를 강조하고자 하는 목적으로 이 단어를 사용하고 있는 것으로 볼 수 있다.2. 믿음에 대한 감사와 칭찬수신자 교회의 믿음에 하나님께 감사를 드리고 칭찬하는 이 표현들은 바울의 편지에서 전형적으로 쓰이고 있는 문장이다.(바울 서신의 서론에서 믿음에 대한 감사의 표현 – 엡1:15-16 / 골1:3-4 / 살전1:2-3 / 살후 1:3-4)(바울 서신의 서론에서 믿음의 칭찬 – 골1:5-7 / 살전1:7-8 / 살후1:3-4 / 몬5) 따라서 이 문장은 로마교회의 믿음이 다른 지역교회에 비하여 특별히 좋았다는 의미를 갖는 것은 아니다. 다만 서론을 여는 형식적인 문장 정도로 보는 것이 적절하다. 그리스-로마 시대에 편지를 보면, 송․수신부에서 안부를 건넨 뒤에 흔히 신에 대한 감사나 기도를 한마디 덧붙이는 경우가 많다. 바울은 그러한 일반적인 편지 형식을 기독교식으로 변형하여 하나님께 감사하고 독자들을 위해 기도하는 내용을 담는다. 이는 이 문단이 편지의 본론으로 들어가기 전 서론부에 해당한다는 것을 나타내준다.(Douglas J....
디바인트리 숲지기 2024.03.08 추천 0 조회 1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