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복음을 생각하고, 알고, 이해하고, 외칩니다.

상담 아카데미에서 외부로 부터의 자극에 의한 상처는 사실 내면의 상처에서 비롯되기에 스트레스 상황을 회피하더라도 내면의 상처가 회복되지 않으면 같은 상황이 다시 반복되기 마련이라고 배웠다.이 경우도 위에 해당하는 사항인지 모르겠지만 아무튼 이 곳에도 역시나 융통성 없고 멍청하기가 한량없는 상관이 존재한다. 아마 지구상 어디를 가더라도 모두가 똑똑하고 융통성 있는(최소한 자신이 멍청하다는 사실을 어느정도는 알고 있는) 사람들로만 구성된 조직이나 공동체는 없겠지..?! 삼성이나 현대, 카이스트나 서울대, 하버드대 같은데 가면 모두가 다 똑똑하고 융통성있고 자신보다 나은 견해를 알아들을 수 있는 사람들만 있을까? 궁금하다..아니면 내 내면의 교만함이 고쳐지면, 다른 사람에게 아주 효율적인 견해가 있음에도 이해하지 못하고 전혀 효율적이지 못하고 융통성 없는 방식으로 일을 시키는 상관을 겸손한 마음으로 나보다 낫게 여길 수 있게 될까?? 이또한 궁금하다..아무튼 이런 상황이 오면 나는 숨이 턱턱 막히도록 답답해 죽을 지경이다.다시한번 말하지만 내가 생각해 볼 때아담의 타락 이 후 인간에게 닥친 가장 끔찍한 저주 중에셋째는 멍청해진 것이요.둘째는 자신이 멍청하다는 사실을 까맣게 잊은 것이요.제일은 자신이 똑똑하다고 믿게된 것이다.정말 끔찍하다..
Monologue 숲지기 2014.10.04 추천 0 조회 22
모든 것을 그리스도께 맡긴다는 것은 노력을 포기한다는 뜻이 아닙니다. 신뢰하는 사람의 충고를 따르지 않는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자신을 그에게 맡겼다면 그에게 순종하기 위해 노력하는 것이 당연한 순서입니다. 그러나 이 때는 전과는 다른 새로운 방식으로, 즉 전만큼 안달하지 않으면서 노력하게 됩니다. 천국의 희미한 첫 빛줄기를 마음으로 이미 맛보았기 때문에 자연히 이렇게 행동하고 싶은 마음이 생겨서 이런 일들을 하게 된다는 것이지요.성경은 한 놀라운 구절 안에 이 두 가지를 통합함으로써 문제를 마무리짓습니다. 그 구절의 전반부는 “두렵고 떨림으로 너희 구원을 이루라”고 되어 있습니다. 이것만 보면 마치 모든 것이 우리와 우리의 노력에 달려 있는 것 같습니다. 그런데 후반부는 이렇게 이어집니다. “너희 안에서 행하시는 이는 하나님이시니.” 이 구절은 마치 하나님이 모든 것을 하시므로 우리는 아무 할 일이 없다고 말하는 것 같습니다.그러므로 나의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가 나 있을 때뿐 아니라 더욱 지금 나 없을 때에도 항상 복종하여 두렵고 떨림으로 너희 구원을 이루라 너희 안에서 행하시는 이는 하나님이시니 자기의 기쁘신 뜻을 위하여 너희에게 소원을 두고 행하게 하시나니[빌립보서2장12,13절]그러나 저는 이 사실이 당황스럽긴 해도 전혀 의외로 느껴지진 않습니다. 여러분도 알다시피 우리는 지금 하나님과 인간이 함께 일할 때 정확히 어디까지가 하나님의 일이고 어디까지가 인간의 일인지 칼로 자르듯 철저하게 구분하려 들고 있습니다. 물론 처음에는 두 사람이 함께 일할 때처럼 “그는 이 일을 하고 나는 저 일을 한다”고 말할 수 있을...
Monologue 숲지기 2014.09.19 추천 0 조회 22
매스미디어를 통해 인간의 성적 본능을 정당화 시키려는 노력은 이미 대중매체의 시작 부터 이루어져왔다.그러나 최근 이루어지고 있는 성욕의 정당화는 한 단계 더 진보된 개념으로 사람들을 세뇌시키고 있다.그리스도인으로써 이를 분별하여 올바른 성욕의 개념을 인지하고 있어야 한다."사랑하니까 당연히 하고싶다"라는 말이 당연하게 받아들여지는 것으로 미루어 볼 때 요즘 사람들이 가지고 있는 큰 착각이 하나는 '사랑을 느끼는 것'과 '성욕을 느끼는 것'을 연속적이고 당연히 뒤따르는 자연스러운 현상으로 여기는 것이 아닌가 싶다. 심지어 거의 동일시 여기기도 하는 것 같다.정말 사랑에 빠져본 경험이 있는 제정신의 사람은 사랑을 느끼는 황홀한 상태가 오히려 동물적인 성욕을 억제해 버리는 것을 경험해 봤을 것이다.이른바 ‘사랑을 느끼는’ 황홀한 상태는 여러 면에서 우리에게 유익을 준다. 그것은 우리가 너그럽고 용감해지도록 도와 주며, 연인의 아름다움뿐 아니라 세상의 모든 아름다움에 눈뜨게 해 주고, 단순한 동물적 성욕을 억제해 준다(처음에는 특히 더 그렇다).그런 의미에서 사랑은 정욕을 이기는 위대한 정복자다. 제 정신을 가진 사람이라면 이러한 사랑이 저속한 육욕과 얼마나 거리가 먼 것인지 알 것 이다.
Monologue 숲지기 2014.08.28 추천 0 조회 18
초면에 반말하는 사람이 기분이 나쁘다.예전에는(지금도 그렇지만) 나이 좀 먹었다고 나이 많은게 벼슬인 양 거드름 피우는 사람들이 꼴보기 싫었는데 내가 그 모양이 되려나 걱정이다.얼굴에 여드름자국이 있어서인지 간혹 나를 얼굴이 좀 삭은 '학생' 정도로 보는 사람들이 있다. 눈이 더럽게 나쁘거나 눈설미가 드럽게 부족하거나..퇴근길에 떡볶이나 사먹을까 해서 분식집에 들렀다. 주인아주머니가 대뜸 반말이다. 기분이 팍 상해가지고 "밤날 고등학생만 왔다갔다 하니까 손님은 다 고삐린줄 아쇼??" 하는 말이 입까지 나왔는데 꾹 참았다.공장에 제품 배달하는 배달차가 와서 나갔더니 배달하시는 아저씨가 대뜸 반말이다 "이보시오! 내 꼴이 이래도 당신한테 하대받을 사람 아니오!" 하는 말이 입까지 나왔는데 꾹 참았다.사람이 죽고싶다는 생각이 들 때는 오직 한가지 경우 뿐인 것 같다. 외로울 때.이 글을 여기까지 읽고계신 분 누구라도 혹시 주변에 요즘 좀 신경질 적으로 변했다거나 힘들어 보이는 사람이 있다면 '힘든일이 있나보다.' 라고 생각하지 마세요!아무리 힘들고 어려운 일이 닥치더라도 또 절망과 좌절이 온다 해도 외롭지 않으면 사람은 모두다 견딜 수 있지 않을까? 사람을 정작 힘들게 하는 근본적인 원인은 외로움이 아닌가 싶다!
Monologue 숲지기 2014.08.23 추천 0 조회 21
2. 많은 사람들이 자신이 지었다는 죄를 한탄하며 스스로를 정죄하는 글을 올리더라.- 기독교란 죄인된 사람의 죄를 예수님께서 대신 죄값을 치뤄주셨고 이를 믿는 사람은 하나님 앞에 의인이 되어 구원을 받는 다는 뜻입니다. 그리고 이를 받아들인 사람들을 그리스도인이라고 부릅니다. 따라서 그리스도인에게 정죄감은 그들이 가질 수 있는 불신앙 중에 가장 큽니다. 정죄감은 구원의 핵심 교리와 정면으로 대치하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결국 이들이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대속을 받아들이지 않고 있다는 뜻이 될 수도있습니다.어떤 경우 정죄감을 반성이나 선한 삶을 살기 위한 채찍질로 여기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러나 이는 큰 어리석음 입니다. 죄를 짓지 않기 위해 더 큰 죄를 짓는 꼴이 아닙니까? 또한 정죄감의 해소를 위한 선한 행위는 어디까지나 자기 의밖에 될 수 없는 한계를 갖습니다.그리스도인은 선한 행위의 동기 또한 선해야 합니다.==========================3. 더욱 많은 사람들이 오늘도 죄를 짓지말고 선을 행하자고 설득하며 외치고 주장하는 글을 올리더라.- 성경이 선을 행하자고 주장할 때는 반드시 그 전제로 복음이 언급됩니다. 그리고 성경은 우리가 선을 행하기가 얼마나 어려운지는 별로 관심이 없어 보입니다. 마치 우리가 하나님 처럼 온전할 수 있기나 한 듯이 선을 행하라고 명령하고 있지요. 성경은 그 근거를 아래와 같이 이야기 합니다.너희 안에서 행하시는 이는 하나님이시니 자기의 기쁘신 뜻을 위하여 너희에게 소원을 두고 행하게 하시나니[빌립보서2장13절]저는 요즘 그리스도인들이 선하게 살자고 외치는 의미가 성경의 외침과는 다르다고 생각합니다. 그들은 마치 은혜와 선행을 일종의 거래로 생각하는 것 같습니다. 하나님께서...
Monologue 숲지기 2014.08.10 추천 0 조회 16
Monologue 숲지기 2014.08.09 추천 0 조회 2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