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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생각하는 크리스천들의 숲</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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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description>복음주의 신학 커뮤니티</descript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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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CDATA[새글]]></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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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description><![CDATA[<p>ㅂㅂ</p>]]></description>
			<author><![CDATA[숲지기]]></author>
			<pubDate>Sat, 04 Apr 2026 07:06:36 +0000</pubDate>
			<category domain="https://saengcrim.com/?kboard_redirect=7"><![CDATA[커뮤니티 게시판]]></catego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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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CDATA[ㅁㅇㄴㅀㅁㄴㅇㅎㄹ]]></title>
			<link><![CDATA[https://saengcrim.com/?kboard_content_redirect=343]]></link>
			<description><![CDATA[ㅁㅇㄴㅀㅁㄴㅇㅎㄹ]]></description>
			<author><![CDATA[박질문]]></author>
			<pubDate>Fri, 03 Apr 2026 11:09:51 +0000</pubDa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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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CDATA[ㄴㄹㅇㅈㄷㄹ]]></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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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description><![CDATA[ㄴㄹㅇㅈㄷㄹ]]></description>
			<author><![CDATA[박질문]]></author>
			<pubDate>Fri, 03 Apr 2026 11:09:37 +0000</pubDa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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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CDATA[ㅁㄴㅇㄻㄴㅇㄹ]]></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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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description><![CDATA[ㅁㄴㅇㄻㄴㅇㄹ]]></description>
			<author><![CDATA[박질문]]></author>
			<pubDate>Fri, 03 Apr 2026 11:09:34 +0000</pubDate>
			<category domain="https://saengcrim.com/?kboard_redirect=8"><![CDATA[방명록]]></catego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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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CDATA[다다]]></title>
			<link><![CDATA[https://saengcrim.com/?kboard_content_redirect=340]]></link>
			<description><![CDATA[다다]]></description>
			<author><![CDATA[박질문]]></author>
			<pubDate>Fri, 03 Apr 2026 11:06:49 +0000</pubDate>
			<category domain="https://saengcrim.com/?kboard_redirect=8"><![CDATA[방명록]]></catego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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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CDATA[생각하는 크리스천들의 자유게시판 입니다.]]></title>
			<link><![CDATA[https://saengcrim.com/?kboard_content_redirect=339]]></link>
			<description><![CDATA[<p>생각하는 크리스천들의 커뮤니티 게시판입니다.</p><p><br /></p><p>생각하는 크리스천들의 방문을 환영합니다.</p><p><br /></p><p><br /></p><p><br /></p><p>이곳에 방문하시는 분들의 다양한 생각을 함께 나누고 공유할 수 있는 온라인 장이 되기를 소망합니다.</p><p><br /></p><p>인사글, 각종 질문, 고민상담, 알리고싶은 소식, 뉴스거리, 심심풀이 유머, 심도있는 철학적인 생각 등등</p><p><br /></p><p>다양한 게시글들을 올려주세요.</p><p><br /></p><p><br /></p><p><br /></p><p>감사합니다.</p>]]></description>
			<author><![CDATA[숲지기]]></author>
			<pubDate>Fri, 03 Apr 2026 10:23:33 +0000</pubDate>
			<category domain="https://saengcrim.com/?kboard_redirect=7"><![CDATA[커뮤니티 게시판]]></catego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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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CDATA[Re:1:1 문의]]></title>
			<link><![CDATA[https://saengcrim.com/?kboard_content_redirect=333]]></link>
			<description><![CDATA[<strong>좋은 남자를 고르는 법(알아보는 법)</strong>

선한 사람과 악한사람이 구분될 수 있을까? 현대의 많은 사상들은 애초에 인간을 '선한 인간'과 '악한 인간'으로 구분하는 것 자체를 거부하고 있는 듯 하다. 포스트모더니즘은 자신들의 사상을 피력하면서 선악의 구분 자체를 의미 없게 만들어 버린다. 그러나 이러한 생각들은 사실 어리석은 궤변에 불과하다. 왜 그런가? 실제 현실과 대응되지 않기 때문이다.. 이 세상에는 실제로 악한 사람이 존재한다.

나이가 어리고 순진할 때는 "세상에 친해지고 나서 나쁘다고 생각할 사람은 없어."라고 생각했었다. 모든 인간은 단지 악한 습관을 가질 뿐이거나 친하지 않은 타인에 대한 강한 적개심을 가지고 있을 뿐, 알고보면 다 착하지, 안착한 사람은 없다고 생각한 것이다. 이와 같은 보편적 인간에 대한 낙관주의는 점차 세상을 알고 사람을 더더 깊이 알아가면서, 세상에 진짜 나쁜사람이 실제로 존재한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그리고 인간에 대해 더 깊이 알게 되면 비로소 성경의 한 구절이 얼마나 뼈저린 진리인지 깨닫게 된다. 그 구절은 바로 "기록된 바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으며(로마서 3장 12절)"이다.

'좋은 남자를 고르는 법'에 대해 이야기 하기에 앞서 우리가 전제하고 있어야 할 점은 '세상에 좋은 사람은 없다.'가 아니다 "세상엔 지독히도 나쁜 겉과 속이 다른 악한 인간이 지겹도록 많이 존재한다." 이다. 그리고 그 비율은 세대가 악해져 감에 따라 점점 더 높아지고 있다. 우리는 이점을 항상 기억하고 있어야한다. 인간을 이해하는 통찰력을 예리하게 만들어 주는 것은 인간에 대한 낙관주의가 아니라 인간에 대한 지극한 현실적 인식을 가지는 것이다. 나쁜사람은 절대 다수이다. 좋은 사람이라고 해서 의인까지 이르는 사람은 한사람도 없지만, 비교적 선한 인간이라고 할 수 있는 사람은 절대적으로 소수에 속한다. 그리고 우리는 지금 이 소수의 사람을 알아보려고 한다.

나쁘든 착하든 남자와 여자는 여전히 만나서 사랑을 하고 결혼을 한다. 그러나 그게 다 인가? 이 시대의 가정은 파탄나고 있다. 대한민국은 OECD국가 이혼률 1위를 지키고 있다. 대한민국 남자가 이상한가? 아니다 동서양을 막론하고 이혼률은 급등하고 있다. 이는 악한 세대의 탓으로 해석할 수 있겠지만, 중요한 것은 지금 이 글을 읽고 있는 사람은 이 세대의 그러한 비극을 피할 수 있기를 소망하며 이 글을 쓴다.

여담이지만 한가지 더 짚고 넘어가고 싶은 것은, 혹여나 '나쁜' 사람을 교정시키고 변화시켜서 '좋은'사람으로 만들고 싶은 욕구가 있다면 가차없이 끊어내고 잘라내고 뽑아내고 잊어내야 한다고 강조하고 싶다. 생각보다 많은 여자들이 이러한 평강공주컴플렉스를 가지고 있는 것을 나는 알고 있다. 그녀들은 그래서 나쁜 남자의 연약한 모습에 감정을 줘버리곤 한다. 주변의 모든 것을 때려뿌시는 헐크가 그가 사랑하는 여인 앞에서는 순둥이가 되는 것, 거대한 괴물 킹콩이 여자주인공 앞에서는 순둥이가 되는 것과 같은 환상을 꿈꾼다. 일부 여자들의 이러한 감정은 치명적이고도 슬픈 그녀들의 약점이다. 그녀들은 자신들의 삶을 기꺼이 비극으로 내어주고 청승맞은 눈물을 흘리다 죽어갈 것이다. 단언컨데, 사람은 조금 교정될 수 있을 뿐, 변하지 않는다. 절대 결코 인간은 변하지 않는다. 극적인 인격의 변화를 이야기 하는 수 많은 인간 사례들은 모두 해석이 필요하다. 그리고 제대로 해석하고 살펴 보았을 때 결국 발견하게 되는 것은 그들은 '변화'를 격은 것이 아니라 원래부터 그랬던 사람이었으나 인생의 어느 순간에'일탈'을 경험했을 뿐이었던 것이다. 따라서 그러한 사례들은 이야기거리가 될 만큼 드문 것이다. 그렇다면 구태여 나빠보이는 사람을 골라 그 확률적은 모험에 자신의 불쌍한 인생을 거는 것은 도대체 무슨 어리석음인가????? 처음부터 좋은 사람을 찾아라.

여담이 길었다. 이제 좋은 남자를 찾는 법에 대해 살펴 보자.

<strong>1. 얼굴은 마음의 거울이다.</strong>
우리는 가족 외에 결혼하기 전까지는 어떤 사람의 24시간을 온전히 지켜보는 경우는 없다. 사실 우리가 마주하는 한 사람의 시간은 그 사람의 인생을 놓고 볼 때 매우 일부분의 시간에 불과하다. 그 사람이 아무도 자신을 보지 않을 때, 그리고 아무도 살필 수 없는 그 사람의 내면에서 어떠한 생각과 감정들이 그 사람 인생의 대부분을 독점하고 있는지 어떻게 알 수 있을까? 분명 쉽진 않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참 다행스럽게도, 인간의 감정이 '표정'이라고 하는 것으로 나타나도록 창조하셨다. 아무리 숨기려 해도 미묘한 '표정'까지 숨길수는 없다. 무의식 가운데서 인간은 자신의 감정을 얼굴로 표현한다. '표정'은 근육의 움직임이다. 우리의 다른 근육들이 그러하듯 지속적으로 사용하는 근육은 점점 발달하고 근육이 붙는다. 따라서 어떤 사람의 얼굴에 나타나는 근육의 형태만으로도 그 사람의 내면에서 많은 시간을 지배하고 있는 감정이 어떤 것인지 알아볼 수 있다.
전통적으로 관상학은 인간의 '사주팔자'를 얼굴로 따지는 미신이지만 지금 이야기하는 '얼굴살핌'은 그러한 사주팔자 관상학과는 다른 것이다. 이 것은 인간의 주요 심리를 파악하는 과학적 관찰 방법이다.
<ul>
 	<li>어떤 사람이 미간 사이의 주름이 지어져 있다면 그 사람은 '부정적인 생각'을 많이 하는 사람이거나, 평소 쉽게 화를 참지 못하는 사람일 가능성이 높다.</li>
 	<li>어금니 쪽의 턱근육이 두껍게 발달한 사람은 화가 많은 사람으로써 사회적 모습에서는 이를 감추기 위해 애를 쓰지만 가정에서는 그러지 못할 가능성이 높다.</li>
 	<li>입술이 꽁치 처럼 앙다문 모양인 사람은 속이 좁거나 고집이 셀 가능성이 높다.</li>
 	<li>눈과 눈썹 사이가 멀거나 눈썹 치켜 올리는 것을 잘하는 사람은 바람둥이일 가능성이 높다. 그는 늘 자신앞에 있는 사람에게 자신을 꾸미고 있을 수 있다.</li>
 	<li>평소에도 표정이 잘 없는 사람은 실제로도 감정적인 무드가 전혀 없거나 매너가 없는 사람일 가능성이 높다.</li>
</ul>
이러한 살핌을 모두 다 살펴보아야 하는가? 물론 그럴수도 있겠지만 이쯤에서 얼굴을 살피는 아주 좋은 방법 하나를 알려 주도록 하겠다.
이런식으로 얼굴을 전혀 살피지 않고 산 사람도 사실 정상적인 지능을 가진 모든 사람은 얼굴살피기의 달인이다. 왜냐하면 인간은 아기때 부터 다른 사람의 얼굴을 살피며 살아왔기 때문이다! 우리는 화난표정, 슬픈표정, 웃는표정 등등등 거의 우리의 무의식 단계에서 부터 타인의 얼굴에 대한 어느정도의 분별력을 가지고 있다. 따라서 작정하고 사람의 얼굴을 살피려고 들면 누구든 어떤 얼굴은 무섭다, 의뭉스럽다, 사기꾼같다 등등으로 쉽게 얼굴을 파악하곤하는 것을 볼 수 있다. 또 한가지 팁은 대중매체의 닮은 배역을 찾아보는 것이다. 드라마나 영화의 감독들은 당연히 배역을 결정할 때 얼굴과 배우의 이미지를 살핀다. 나쁜 악역을 맡은 배우는 악역을 자주 맡게 된다. 물론 드라마에서 나쁜 얼굴을 하고 있다고 해서 그 배우가 실제로 나쁜 건 아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연기자이니까! 그러나 그 배역을 맡기는 감독과 작가들은 보편적인 사회의 인식에서볼때 그러하다고 보여지는 이미지의 얼굴을 배역으로 시키기 마련이다. 따라서 어떤 사람이 어떤 드라마나 영화의 어떤 배역에 잘 어울리거나 닮았다면 그 삶은 그러한 사람일 가능성이 높다.
이쯤으로 얼굴에 대한 이야기를 마무리 하면서, 혹 이런식으로 얼굴을 살피는 것이 전적으로 그 인간을 초장부터 판단해버리는 사람으로 만들어 버리는 것이 아닌가? 하는 오해를 하지 않기를 바란다. 분명히 말하지만 우리는 지금 '좋은 사람을 찾는 방법'에 대해 이야기 하고 있는 것이며, 그 방법 중 하나인 것이다. 이러한 방법으로 만나는 모든 사람을 판단해버리지는 말자..;;(그러나 인생을 더 살면서 더더 느끼게 되는건,, 많은 사람들이 참... 생긴대로 논다..;; 사기꾼은 사기꾼 처럼 생겼다!!)

<strong>2. 예수 그리스도를 유일한 나의 구주로 고백하는가?</strong>
신앙서적 중에서도 연애와 결혼, 이성문제에 대해 다루는 수많은 서적에서 과연 예수를 믿는 믿음의 정도가 짝을 찾는데 얼마만큼 중요한가?의 문제를 언급하고 넘어간다. 그 중 흔하게 많은 이들을 설득하는 말은 '믿음'은 생길 수 있지만 '인격'은 좋아지기 어렵기 때문에 믿음보다 인격을 더 보아야 한다는 소리다. 이건 그야말로 믿음이 없는 사람의 말이다. 나는 분명하게 경고한다. 복음의 진리 가운데 바로선 신앙이 있는가를 꼭 조건으로 삼아야 한다.
비그리스도인과 그리스도인 사이에 있는 생각의 격차는 요즘 시대에 들어서는 더욱 커졌다. 일례로 '성도덕'에 대한 생각의 차이만 본다 하더라도 아무리 인격적으로 착한 사람도 일단 신앙이 없으면 더이상 세상으로 부터 기독교에서 요구하는 그 수준의 생각에 털끝만큼도 미치지 못하는 생각을 가지고 있다. 비단 이뿐만 아니라 근본적으로 '속사람'이 다른 존재와 어떻게 평생을 함께 할 수 있단 말인가?? 나를 통해 그 사람이 구원받으리라는 헛된 희망으로 평생을 핍박받으며 남편과 함께 교회를 나오지 못하시는 집사님 권사님들이 한국 교회에 얼마나 차고 넘치게 수두룩 한가??? 그분들의 남편들은 결국 교회를 나와도 진정한 그리스도인으로 거듭나는 일은 극히 소수의 간증들에서만 이야기 된다. 거듭 말하지만 그러한 도박을 하지 마라. 결단코 하지 마라. 하나님이 너를 아끼신다. 너는 그러한 길을 결단코 가지 마라...

<strong>3. 원가정의 상처가 어떠한가?</strong>
요즘 같은 시대에는 가정의 상처가 없는 사람을 찾기가 참 어렵다. 그러나 결단코 무시해서는 안되는 것이 가정에서의 상처를 살피는 것이다. 아무리 좋아보이는 남자라 할지라도 그가 가정을 이루는 순간 그 남자는 자신의 아버지를 따라하게 된다. 그는 그가 배운것을 행할것이다. 예외를 말한다면, 그가 만약 그 원가정에서 받은 상처를 성령 안에서 정말 건강하고 복음적으로 치유받았으며, 건강하게 분화 되었으며, 혹여라도 나올 무의식적인 행동에서라도 자기 자신의 상태를 바로 인식할 만큼 정신적, 신앙적으로 충분히 성숙하다면 예외가 될 수 있다.
<ul>
 	<li>그의 어린 시절 부모님은 그에게 어떤 분이었는가?(지금 아무리 좋아졌다 한들 소용없다. 어린시절의 부모님을 그는 답습할 것이다.)</li>
 	<li>그의 어린 시절 그의 부모님은 사이가 어땠는가?</li>
 	<li>그의 아버지는 그의 어머니를 어떻게 대해 오셨는가?</li>
 	<li>그의 아버지의 성격은 어떠한가?</li>
 	<li>그의 가정은 가부장적인가?</li>
 	<li>그의 가정은 권위적인가?</li>
 	<li>그의 부모님은 그를 율법적으로 억압하였는가?</li>
</ul>
물론 이러한 사항을 아는 것은 어렵다. 그러나 우리는 나눔이나 평소 그의 태도 그리고 말투 등등을 통해서 이러한 것들을 유추해 보기 위해 애써 보아야 한다. 그리고 이러한 사항들은 설사 연애를 시작하고 심지어 결혼을 준비하는 과정 중에도 '아니다'싶은 것들이 발견되는 순간 그 관계는 끊는 것이 현명하다. 결혼하고 평생을 스트레스 받으며 사는 것 보다. 파혼하는 것이 훨씬 더 현명하고 지혜로운 성령의 방법이다.(흔한 얘기로 이혼보다 파혼이 낫다라는 말이 있다.)

<strong>4. 말이 통하는가?</strong>
나이 많은 여자분들의 남자를 고르는 법에 대한 의견을 물을 때 꼭 들어가는 말이 바로 이 것이다. '말이 통하는 남자를 만나라.' 이 것을 좀 더 자세히 말하자면 '지적 수준이 상식적이고 합리적인 수준인가?'라는 것이다. 앞서 살펴 보았듯이 세상에는 나쁜 사람들이 참 많다. 그러나 동일한 원리에 따라 세상에는 생각보다 멍청한 사람들이 많다.(이러한 발언을 차별적인 발언으로 오해하지 말라! 거듭 말하지만 우리는 지금 좋은 남자를 찾는 법에 대해 살펴 보고 있다!) 세상에는 멍청한 사람들이 참 많다. 그리고 적어도 지금 이 글을 이해하고 있는 지적 수준의 여자라면 생각보다 많은 겉보기에 직장과 학력이 멀쩡한 남자들도 막상 깊은 대화를 해 보면 이해력이 대단히 딸린(;;)다는 점을 발견할 수 있으리라 생각한다. 이는 분명 학력과 직업과 절대적으로 무관하다. 고학력을 가지고 대기업에 다니는 사람들 중에서도 터무늬없이 이해력이 딸려서 대화가 잘 안되는 사람들이 매우 많다.
그렇다면 왜 이를 따져야 하는가? 실제로 대화가 통하지 않는 사람과 살아보기 전에는 너무나도 쉽게 간과해 버릴 수 있는 점이 바로 이것이기 때문이다. 결혼해서 평생을 함께 하면서 대화가 통하지 않는다고 진지하게 생각해보라. 단지 한두해 같이 사는게 아니라.. 평생을 같이 살아야 하는데.. 대화가 잘 통하지 않아.. 내가 때때로 마음의 이야기를 해도 이해를 잘 못해... 그게 사는거냐...... 그냥 생각 없이 사는거지.. 진짜 죽도록 외로운 외로움은 그럴때 찾아오는 거다..

<strong>5. '나'를 알면 누구를 만나야 할지가 보인다.</strong>
앞서 이야기 했던 모든 사항들을 고려한다 하더라도 인간은 짝이 있다. 옛말에 짚신도 짝이 있다고 했다. 왜그런가 보자. 인간은 아무리 한 가정에서 태어난 형제자매라도 다르다. 형제끼리도 같이 살면서 안맞아서 싸우고 볶는다. 하물며 전혀 다른 부모와 전혀 다른 인생을 산 두 사람이 만나서 함께하는 일을 생각해 보라. 이 것은 마치 전혀 다른 공장에서 전혀 다른 기술자의 손에서 만들어진 두개의 톱니바퀴가 맞물려 돌아가야 하는 것과 같은 것이다. 물론 우리는 완벽히 잘 맞아 돌아가는 다른 톱니바퀴를 발견할수는 없다. 그러나 어느정도는 맞아야 윤활류를 뿌려가며 돌릴수가 있다. 이를 좀 더 깊이 살펴 보자.
사람마다 탕수육의 찍먹 부먹이 갈리듯, 취향과 호불호가 다르다. 그런데 단순히 그러한 것들이 다른 것은 전혀 문제가 아니다. 문제가 되는 점은 바로 '상처'이다. 내가 어떤 상처를 가지고 있고, 어떤 말에 예민하며, 어떤 행동에 상처를 받는지가 상대방의 말과 태도와 행동과 생각에서 충돌하지 않아야 한다. 예를 들어 나는 연락 하는 것에 매우 예민하다고 가정해 보자. 그런데 상대는 그러한 영역에는 전혀 무심한 사람이라고 했을 때 이를 인간적인 의지적 노력으로 극복하는 것은 매우 어렵다. 길어야 1~2년이면 그러한 노력은 끝난다. 이러한 것들을 또 다른 관점에서는 '사랑의 언어'로 이야기 할 수도 있다. 그 사람의 어떠한 부분이 내게 상처를 줄 수 있는 부분이라면 이는 심각하게 고려해보아야 할 사안이 된다. 따라서 먼저 '나의 상처'가 무엇인가? 나는 어떤 것에 예민한가? 나의 사랑의 언어는 무엇인가? 등등 나에 대한 것들을 알아야 한다. 그리고 난 후...
나와 비슷한 사람을 찾아라.
사실 사람은 자연스럽게 자신과 반대되는 사람에게 매력을 느낀다. 이를 두고 진화심리학자들은 다양한 유전자를 만들기 위한 본능이라고 해석하기도 한다. 그러나 유물론자들의 헛소리에 편승하지 말자. 나와 비슷한 사람을 만날 수록 행복할 확률은 올라간다. 현실적으로 생각해보라. 결혼을 한다는 건 평생을 함께 살 룸메이트를 구하는 것이다. 룸메이트가 나랑 성향이 너무 다르다면 신혼의 행복은 결코 길지 못할 것이다. 자고로 룸메이트는 나랑 성향이 비슷할 수록 편한 법이다. 그리고 이해의 폭도 나와 비슷할 수록 더 넓어질 수밖에 없지 않은가? 나와 비슷하기 때문에 때때로 밉고 다퉜을때 이해를 해도 이해가 되게 된다. 나와 다르면 도저히 이해가 안되는 건 도저히 이해가 안되며 그 골은 세월과 함께 깊어갈 것이다.

<strong>6. 인간이해 통찰력이 있는 사람의 조언을 구하라!</strong>
앞서의 모든 사항들을 다 살펴 본다 하더라도 내가 바라보는 시각은 어디까지나 나의 인간이해 통찰력의 한계를 가지고 있다. 자고로 심각한 병은 세명 이상의 의사에게 보이라는 말이 있다. 하물며 '평생을 사랑할 사람'을 고르는데, 오직 나의 통찰만 본다는 건 매우 위험할 수 있다. 나를 아끼는 주변의 지혜로운 친구들, 나를 제일 잘 아시는 나의 부모님, 인간이혜 통찰력이 있는 지도자 등등 나를 아끼면서 동시에 지혜로운 사람들의 의견을 들어보자. 만약 그들이 고개를 갸우뚱 한다면, 어쩌면 당신이 몰랐으면 죽도록 후회했을 치명적인 부분을 간과하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ul>
 	<li>결혼 연령이 높아지고, 혼인률이 낮아지면서 교회 안에서 많은 어른들이 그저 '결혼을 위한 만남과 주선'을 남발하고 있다. '저 형제 정도면 괜찮다'느니 '따지지 말고 아무하고나 결혼하라'느니 이딴 책임감 1도 없는 소리를 하는 어른들에게는 그저 썩소와 함께 묵비권을 행사하여 '나 엄청 귀한 여자다 그런식으로 말하지 말라'라는 것을 충분히 어필해 주자.</li>
 	<li>만약 진짜 좋은 사람을 만났는데 그 사람이 나를 안좋아하면 어쩌나요?? 하는 질문으로 부터 부디 자유로워 지기를 바란다.(이 또한 자존감과 연결되어 있다는 점에서 매우 중요하다.) 당신이 만약 하나님이 예비하신 것 같은 정말 좋은 사람을 만났다면 당신이 그 사람을 유혹하고 꼬시는 것은 전혀 문제가 되지 않을 것이다. 당신이 뚱뚱하다고, 못생겼다고, 나이가 많다고, 조건이 없다고, 그래서 그런 남자를 만나고 꼬실수 없으면 어쩌나 하는 고민이 있다면 부디부디 떨쳐 버리라. 당신은 충분히 그 남자를 꼬실 수 있다. 그리고 진짜 당신과 잘 맞는 좋은 사람이라면, 당신이 그 사람이 좋은 사람이라는 것을 알아본 순간 분명히!! 그 사람도 당신이 좋은 여자라는 것을 알아볼 것이다.</li>
 	<li>"이렇게 조건 따지고 앉아 있다가 결국 시집 못가는거 아니냐??"라고 묻는다면, 나는 "그래서 적당히 만나 결혼해서 이혼하려면 하던지."라고 대답해주고 싶다. 없다면 차라리 혼자 살리라! 라는 마인드를 가져라! 지금이 무슨 중세시대도 아니고, 여자가 남자 없으면 못사나??? 사도 바울도 아래와 같이 분명히 말했다.</li>
</ul>
고린도전서 7장(표준 새번역)
25.주님께서 처녀들에 대해서 하신 명령을, 나로서는 받은 것이 없습니다. 그러나 나는 주님의 자비하심을 힘입어 믿을 만한 사람이 된 사람으로서, 의견을 제시합니다.
26.지금 닥쳐오는 재난 때문에, 사람이 현재 상태(결혼하지 않은 상태)대로 살아가는 것이 좋다고, 나는 생각합니다.
27.아내에게 매였으면, 그에게서 벗어나려고 하지 마십시오. 아내에게서 놓였으면, 아내를 얻으려고 하지 마십시오.
28.그러나 결혼한다고 할지라도, 죄를 짓는 것이 아닙니다. 그리고 처녀가 결혼을 하더라도, 죄를 짓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나 그들이 살림살이로 몸이 고달플 것이므로, 내가 아껴서 말해 주는 것입니다.

바울은 "결혼하는게 나쁜 것은 아니지만, 궂이 결혼하려고 하지 말아라"라고 말하면서 "내가 아껴서 말해 주는 것입니다"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애초에 마음을 닫아놓고 "나는 결혼 안할꺼야!! 독신주의자야!!"라고 말하는 것도 대단히 어리석습니다. 내 앞에 누가 예비되어 있을 줄 알고 그렇게 함부러 말할수 있단 말입니까??
그러나 "그게 누구든 나는 결혼은 꼭 해야겠소!!"라고 말한다면 이 또한 똑같이 어리석은 자세 입니다. 도대체 결혼이 뭐라고 생각하기에 그토록 쉽게 말한단 말입니까??
앞서 살펴본 기준을 가지고 있으면서, 아무에게나 함부러 마음을 주지 않으면서, 현명하고 현숙하고 지혜롭게 하루하루 주님이 주신 인생을 살아가십시오!
중국 한비자에 [유연천리래상회 무연대면불상봉(有緣千里萊相會 無緣對面不相逢)]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인연이 있으면 천리가 떨어져 있어도 만나지만, 인연이 없으면 얼굴을 마주하고서도 만나지 못한다.]라는 뜻 입니다.

주님과 함께 자기 자신의 삶을 살아가십시오.^^]]></description>
			<author><![CDATA[숲지기]]></author>
			<pubDate>Sat, 22 Mar 2025 09:22:17 +0000</pubDate>
			<category domain="https://saengcrim.com/?kboard_redirect=1"><![CDATA[익명 Q&A]]></category>
		</ite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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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CDATA[1:1 문의]]></title>
			<link><![CDATA[https://saengcrim.com/?kboard_content_redirect=332]]></link>
			<description><![CDATA[숲지기님, 좋은남자를 가려내는 방법은 무엇인가여?]]></description>
			<author><![CDATA[박질문]]></author>
			<pubDate>Fri, 21 Mar 2025 09:12:28 +0000</pubDate>
			<category domain="https://saengcrim.com/?kboard_redirect=1"><![CDATA[익명 Q&A]]></category>
		</ite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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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CDATA[권선징악 너머에 계시는 하나님 제시를 통한 욥기의 딜레마 극복]]></title>
			<link><![CDATA[https://saengcrim.com/?kboard_content_redirect=300]]></link>
			<description><![CDATA[<p style="text-align:center;"><iframe width="560" height="315" src="https://www.youtube.com/embed/vUdAkneKdY8?si=5HBHfds9gf0QpP0I" title="YouTube video player" frameborder="0" allowfullscreen></iframe></p><p style="text-align:center;"><br /></p><p style="text-align:center;"><img src="https://saengcrim.com/wp-content/uploads/kboard_attached/6/202604/69cdd744e71955961242.png" alt="" style="width:600px;" /><br /></p><h1>Ⅰ. 기존 욥기 주제들과 딜레마</h1><p>  기존 욥기서를 해석하는 일반적인 몇 가지의 주제들을 살펴보고, 그 해석들이 가지는 딜레마를 살펴 본다.</p><p><br /></p><h2>1. 지혜문학 – 권선징악(응보의 교리)전달 목적</h2><p> 욥기는 흔히 잠언서, 전도서와 함께 지혜 문학으로 여겨졌다. 욥기가 그렇게 여겨진 것은 욥기가 교육을 목적으로한 일련의 교훈들을 담고 있다고 보았기 대문이다. 그리고 욥기를 통해 더 바른 삶과 선한 삶 그리고 의로운 삶을 살 수 있게 하는 교육적 효과가 있다고 보았다.</p><p><br /></p><h3>    1) 욥기를 교육적 목적의 책으로 보았을 때 내용과 결론 </h3><p> 욥기의 등장 인물인 욥은 평온한 삶을 살다가 고난을 만난뒤 욥기의 대부분을 그 고난 속에서 4명의 다른 등장인물과 인간 삶과 하나님에 대한 담화를 나눈다. 그리고 하나님의 등장과 함께 욥은 다시 이전의 평온했던 삶으로 돌아갈 수 있게 된다.</p><p> 욥기에서 외곽틀을 차지하는 욥의 평온했던 삶에 대한 내러티브는 욥의 고난의 상황을 이끌어 내고 거기에 현실성을 더하는 기법으로 볼 수 있다. 이를 통해 독자들을 욥기의 가장 긴 부분인 고난 가운데 담화로 이끌어 들이는 것이다. 여기서 독자가 가질 수 있는 "욥은 왜 고난을 받는가?"라는 질문은 어디까지나 청중으로 하여금 그 대답을 기대하며 담화에 집중하게 만들 소산인 저자의 의도일 뿐이다. 따라서 욥기의 주제 혹은 목적은 결국 욥이 왜 고난을 받는가에 대한 대답을 논하려고 한 것이 아니라 그에 대한 궁금증으로 인해 담화를 정독하게 된 독자들이 담화를 통해 인생의 이치와 진리를 읽게 하는 데에 목적이 있는 것이다.</p><p> 따라서 이런 관점으로 보았을 때 욥기는 세 친구 그리고 엘리후와의 담화를 통해 인생 가운데 개입하셔서 권선징악(응보의 교리)를 실천하시는 하나님에 대해 배우고 그에 대한 경외심을 갖게 하는 책인 것이다.</p><p><br /></p><h3>    2) 이 해석의 딜레마</h3><p> 욥기를 담화를 통해 전달되는 일련의 삶과 하나님에 관한 진리 전달을 목적으로 하는 교육적 책으로 보았을 경우 생기는 딜레마는 바로 외곽틀에 있다.</p><p> 욥기 후반 외곽틀에서 등장하는 하나님은 욥의 친구들의 말을 옳지 못하다고 평가하고 있다.</p><p><br /></p><blockquote>여호와께서 욥에게 이 말씀을 하신 후에 여호와께서 데만 사람 엘리바스에게 이르시되 내가 너와 네 두 친구에게 노하나니 이는 너희가 나를 가리켜 말한 것이 내 종 욥의 말 같이 옳지 못함이니라[욥기 42장 7절]</blockquote><p><br /></p><p> 욥기의 주제를 욥과 세 친구의 담화에 있다고 보았을 때 욥기가 전달하고자 하는 내용은 권선징악의 원리 이다. 그러나 담화를 통해 대치하고 있는 욥과 친구들 중 권선징악을 주장하고 있는 쪽은 세 친구이다. 세 친구는 욥을 향해 계속해서 권선징악을 실현하시는 하나님(응보의 교리)에 대해 이야기 하고 있고, 욥은 그런 친구들을 대항하여 자신의 결백을 주장하고 있다. 그러나 외곽틀에 와서 등장하신 하나님은 욥과 친구들의 담화에서 욥의 손을 들어준다.</p><p> 담화를 지나온 사람들은 잠정적으로 욥의 고난의 이유에 대해 우리가 알지 못하는 어떤 욥의 죄가 있기를 기대한다. 그리고 등장한 하나님께서는 그 기대에 부흥하시듯 욥을 밀어 붙이신다. 그러나 하나님의 결론은 독자의 기대와는 관계 없이 욥이 옳고 친구들이 틀렸음을 이야기 하고 있다. 독자는 혼란에 빠지는 것이다.</p><p> 욥기의 주제를 교훈과 교육의 목적으로 본다고 한다면 결론적으로 욥은 그 어떤 대답도 전달하고 있지 않다. 결국 우리는 결말에서 하나님의 대답과 욥기 담화 사이의 딜레마가 있는 것이다.</p><p><br /></p><p><br /></p><h2>2. 연단과 그 속의 인내를 전달</h2><h3>   1) 고난 가운데서도 인내해야 함을 전달하고자 함의 내용과 결론</h3><p> 욥기의 외곽틀을 여전히 독자로 하여금 욥의 고난에 집중하기 위한 장치로 보고, 욥이 고난 속에서 인내함을 보여주고자 함이다.</p><p> 욥은 고난 가운데로 들어간다. 여기서 독자들은 욥의 고난의 이유에 대한 궁금증을 가진다. 그러나 욥의 담화와 후반 하나님의 등장을 통해서 욥의 고난의 이유에 대한 대답은 등장하지 않는다. 따라서 욥기의 주제는 욥의 고난의 이유에 대해 이야기 하고자 하는 목적이 아니다. 오히려 그 고난의 이유에 대해 묻는 질문 자체를 뛰어 넘어 고난의 현실 속에서 인내하는 욥의 모습을 통해 현실의 독자 또한 고난의 상황 가운데서 인내해야 함을 시사하는 것이다.</p><p> 현실의 독자는 늘 고난의 상황에 직면해 있다. 크고 작은 고난의 상황이 우리에게 닥쳤을 때, 우리의 마음 속에서는 늘 “왜?”라는 근본적인 질문에 대한 대답을 갈구한다. 그리고 그 질문에 대한 대답은 어떠한 식으로든 확신있게 알 수 있는 대답으로 우리에게 찾아오지 않는다. 심지어 하나님께서 눈 앞에 나타나신다고 하더라도 그 질문을 드릴 수 없다. 근본적인 질문에 대한 해답이 없는 상태는 고난 속에 있는 우리로 하여금 그 고통에 가중한 고통을 더할 뿐이다. 따라서 욥기는 그 고난의 이유에 대해 생각함으로 고난에 고난을 더하는 어리석음을 타파시키고 오직 그 고난을 주신 하나님께서 등장하시고 우리를 구원해 주실 때까지 인내하라는 교훈을 전달해주고 있는 것이다.</p><p> 욥기를 통해 독자는 욥이 자신 보다 더 큰 고통에 처해 있음을 본다. 욥은 사실 상 이 땅 가운데 고난이라고 불릴 수 있는 모든 것들을 한꺼번에 안고 있다. 이러한 설정은 읽는 독자로 하여금 자신의 고난 보다 더 큰 고난 가운데서도 인내하고 있는 욥의 모습을 통해 자신의 고난이 주는 고통을 덜어주는 효과와 더불어 나 또한 인내한다면 결국 하나님의 등장으로 나의 이 고난을 종결시켜 주리라는 희망을 가질 수 있게 한다.</p><p><br /></p><h3>   2) 이 해석의 딜레마</h3><p> 욥기를 통해 인내를 전달하고자 했다면 욥의 처음 외곽틀에서 나오는 욥의 독백은 그 효과가 대단히 클 수 있다. 심지어 자신의 아내 마저도 견디기 어려울 만큼 힘든 고난 속에서도 욥은 초월의 독백을 던진다.</p><p><br /></p><blockquote>이르되 내가 모태에서 알몸으로 나왔사온즉 또한 알몸이 그리로 돌아가올지라 주신 이도 여호와시요 거두신 이도 여호와시오니 여호와의 이름이 찬송을 받으실지니이다 하고 [욥기 1장 21절]</blockquote><p><br /></p><p>욥의 이러한 고백은 마치 욥기가 이 후 이끌고 갈 모습이 욥의 고난 가운데 초연한 인내의 모습을 전달하는 듯 보인다. 그 다음 가중된 그의 고통 속에서 욥의 아내가 욥을 원망하는 대화 가운데서도 욥은 초인적 인내의 전형을 보여준다.</p><p><br /></p><blockquote>그의 아내가 그에게 이르되 당신이 그래도 자기의 온전함을 굳게 지키느냐 하나님을 욕하고 죽으라 <br />10.그가 이르되 그대의 말이 한 어리석은 여자의 말 같도다 우리가 하나님께 복을 받았은즉 화도 받지 아니하겠느냐 하고 이 모든 일에 욥이 입술로 범죄하지 아니하니라[욥기 2장 9-10절]</blockquote><p><br /></p><p>욥은 이러한 인내의 전형을 이 후 담화를 통해서도 꾸준히 보여 줄 것을 독자는 기대한다. 그러나 이 후 욥의 세 친구가 등장하고 욥의 태도는 돌변한다.</p><p><br /></p><blockquote>그 후에 욥이 입을 열어 자기의 생일을 저주하니라[욥기 3장 1절]</blockquote><p><br /></p><p> 독자는 초인적 인내의 모습을 보여준 1,2장의 욥에대한 존경심과 그가 결국 끝까지 인내할 것이라는 기대를 가졌다. 그러나 3장에서 등장한 욥은 독자들의 그러한 기대를 여지없이 무너뜨린다. 욥은 자신의 생일을 저주하기 시작한다.</p><p> 이후 욥기의 대부분을 차지하는 담화에서 욥의 신세한탄은 극을 향해 치닫는다. 처음 자신의 아내에게 의연한 대답을 했던 욥은 사라지고, 자신의 의로움을 변론할 하나님을 찾아 울부짖는다. 독자는 이러한 욥의 모습을 보면서도 욥의 고난이 그 만큼 극심했을 것으로 보고 정상참작해 줄 수도 있다. 결국 욥은 자신의 생명을 해하거나 하나님을 저주하는데 까지 이르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욥이 담화에서 보여준 보습은 죽지 못해 사는 모습이지 고난 속의 인내하고 있는 모습으로 보여지기에는 다소 무리가 있다. 또한 2장과 3장의 욥의 태도 변화 이유에 대한 설명이 없다.</p><p> 무엇보다 욥과 친구들의 담화를 통해 전달하는 내용은 욥의 고난 가운데 인내를 시사하고 있지 않다. 그들의 대화는 명확하게 권선징악(응보의 교리)의 하나님과 자신의 결백을 주장하는 욥으로 대치되고 있기 때문이다. 욥기가 정말 욥의 고난 속의 인내를 보여주고자 했다면, 욥과 친구들의 담화 속에 대립하고 있는 주제가 일치하고 있지 않다. </p><p> 또 다른 딜레마가 있는데, 그 것은 욥기의 결론이다. 욥의 고난이 인내를 통해 견뎌진 욥의 모습을 보여주고자 함이었다면, 욥기의 결말의 근거는 욥의 인내한 대가로 보아야 한다. 여기서 몇 가지의 딜레마가 추가되는데, 첫째, 하나님께서는 욥의 인내를 고난을 통해 시험하시는 분이신가? 그렇다면 하나님은 독자에게 선의 하나님으로 비춰질 가능성 보다는 공포의 하나님으로 비추어질 가능성이 더 크다. 이는 다시 욥기의 담화에 등장한 권선징악의 하나님과 대치된다. 둘째, 그렇다면 욥기의 결말은 Happy Ending인가? 욥은 다시 부를 얻지만, 하나님께서는 욥의 이전에 가졌던 상실감과 슬픔은 고려하지 않는다. 그리고 욥은 다시 원점으로 돌아가 언제 또 다시 자신의 신앙과 인내를 시험할 하나님의 고난이 들이닥칠지 알수 없는 고난 속의 삶을 살아가야 한다. 그렇다면 욥기의 결말은 공포의 결말이지 결코 해피엔딩이 될 수 없다.</p><p><br /></p><p><br /></p><h2>3. 신정론</h2><h3>   1) 욥기의 주제를 신정론으로 보았을 때의 내용과 결말</h3><p> 인간은 왜 고통받는가? 에 대한 질문은 욥기를 읽는 독자로 하여금 가장 궁극적 궁금증으로 다가온다. 욥기를 통해 이러한 해답을 얻고자 하는 독자들을 향해 욥기는 이에 대한 대답을 해주고 있다고 보는 견해이다. 즉, 욥기의 주제와 목적을 신정론에 대한 해답으로 보는 것이다.</p><p> 욥기는 하나님을 경외하는 의로운 사람이었으나, 사탄의 참소로 인해 고난에 빠진다. 그리고 욥은 엘리후를 포함한 네명의 사람들과 일대의 담화를 나누게 된다. 담화를 통해 드러나는 욥의 태도는 자신의 무고함을 항변하는 모습이다. 그러나 이는 죄가 없는 사람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친구들의 대화와 대치되고, 실제로 현실성을 부여하는 것은 친구들의 대답이다. 욥은 독자들로 하여금 비현실적이고 교만하고 가식적인 자세로 비춰지거나, 고난 속에서 어리광 부리는 사람으로 비춰질 따름이다. 결국 독자들은 잠정적으로 욥이 어떤 숨겨진 죄가 있을 것으로 기대한다.</p><p> 독자들의 이러한 기대에 대하여 욥은 자신 앞에서 위엄있는 모습으로 등장한 하나님 앞에 굴복한다.</p><p><br /></p><blockquote>그러므로 내가 스스로 거두어들이고 티끌과 재 가운데에서 회개하나이다[욥기 42장 6절]</blockquote><p><br /></p><p> 여기서 회개라는 단어가 주는 해소감이 있다. 독자들은 은연중에 하나님의 등장 이후에도 하나님께서 우리가 알지 못했던 욥의 죄과를 들춰내 주시기를 기대할 수 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욥의 죄를 들춰내는 부분이 등장하지는 않았지만, 욥은 하나님 앞에 회개를 선포한다. 이 대답으로 하여금 독자는 욥이 결국 자신과 하나님만이 아는 어떤 죄과를 회개함으로 그의 고난을 종식시키고 있다고 여기게끔 한다.</p><p> 욥의 죄의 구체적인 사안들을 언급하지 않은 것에 대해서는 읽는 이로 하여금 자신이 가지고 있는 숨겨진 죄를 대입할 수 있는 여지를 남겨주는 효과를 가진다. 따라서 결국 욥기의 담화와 이야기를 통해 독자는 숨겨진 죄로 인해서도 고난의 심판을 받을 수 있는 가능성과 고난 앞에서 즉각적 회개를 촉구하는 소리를 듣게 되는 것이다.</p><p><br /></p><h3>   2) 이 해석의 딜레마</h3><p> 욥은 정말로 숨겨진 죄 때문에 고난을 당했는가? 욥과 하나님만 아는 어떤 죄가 욥에게 있었는가? 이러한 질문은 욥기의 마지막에서 기억이 흐릿해진 욥기의 첫 번째 내러티브와 딜레마에 부딪친다.</p><p> 욥기의 처음 외곽틀에 등장하는 천상의 회의는 하나님의 입을 통해 욥의 경외함과 의로움을 이야기 한다.</p><p><br /></p><blockquote>여호와께서 사탄에게 이르시되 네가 내 종 욥을 주의하여 보았느냐 그와 같이 온전하고 정직하여 하나님을 경외하며 악에서 떠난 자는 세상에 없느니라[욥기 1장 8절]</blockquote><p><br /></p><p> 전지자이신 하나님의 입을 통해 욥의 무죄함은 이미 전제되고 있었던 것이다. 그렇다면 욥의 죄를 고난 이후로 본다면 어떨까?</p><p> 욥은 고난 후 2장 말미까지는 입으로 죄를 짓지 않았다고 기록하고 있다. 그러나 친구들의 등장과 담화를 통하여 욥은 독자들이 보기에도 거북스러운 자신의 정당성을 주장하는 교만을 보인다. 독자들은 절대자이신 하나님 앞에서 자신의 옳음을 주장하는 욥에 대해 쉽게 그가 죄를 짓고 있다고 생각 할 수 있다. 바로 욥의 회개는 이에 해당하는 것이다.</p><p> 그러나 이 생각은 이미 대단히 모순적이다. 처음 질문 자체가 욥이 왜 고난을 받게 되었는가?에 대한 질문이나 고난 가운데 지은 죄는 그 고난의 이유에 합당하지 않기 때문이다. 따라서 욥이 자신의 정당성을 주장한 것에 대해 정죄하고 이를 42장에서 욥이 회개한 이유로 볼 수는 있지만 결국 처음 질문인 신정론에 대한 대답으로 치부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p><p><br /></p><p><br /></p><h2>4. 불가지론</h2><h3>   1) 욥기는 ‘불가지론’을 주제로 한 책이라는 견해</h3><p> 결국 욥기는 신정론에 대한 어떠한 대답도 해주고 있지 않다. 또한 욥기의 담화 속에 등장하는 권선징악의 하나님(응보의 교리)에 대해서도 정면으로 부정하고 있다. 욥의 전반 내러티브에 등장한 천상의 회의는 그 내용 자체가 담화에서는 감추어져 있고, 담화의 내용과 무관하다는 점에서 아이러니다. 또한 후반에 등장한 하나님과 전반 내러티브에 등장한 하나님의 모습이나 욥에 대한 태도 또한 대조된다.</p><p> 욥기는 책의 본체를 차지하는 담화를 통해 권선징악의 하나님을 이야기 하는 듯 하다가 하나님의 등장과 함께 권선징악의 탈피를 보여주는 듯 하다가 결론에서 다시 욥에게 부를 선물하는 하나님을 통해 권선징악의 하나님으로 돌아간다.</p><p> 이와 같은 주제의 혼동성이 바로 욥기가 본디 의도한 결론이라는 것이다. 욥기의 이러한 결론은 담화에서 마지막으로 등장하였고, 하나님으로부터 정죄 받지도 않았던 엘리후의 말을 통해서 드러난다.</p><p> 엘리후는 담화의 결론을 이끌어내는 인물처럼 마지막에 등장하여 장황하게 하나님의 크신 행동들을 열거한 뒤 불가지론의 결론을 이끌어 낸다. 엘리후의 결론이다.</p><p><br /></p><blockquote>전능자를 우리가 찾을 수 없나니 그는 권능이 지극히 크사 정의나 무한한 공의를 굽히지 아니하심이니라 그러므로 사람들은 그를 경외하고 그는 스스로 지혜롭다 하는 모든 자를 무시하시느니라[욥기 37장 23,24]</blockquote><p><br /></p><p> 욥기를 통해 당연히 가지게 되는 신정론에 대한 질문이나 혹은 담화를 통해 들어나는 권선징악의 하나님과 욥의 정당성 사이의 딜레마 등 욥기는 뚜렷한 해답을 제시해 주고 있지 않다. 심지어 끝에 등장한 하나님 마저도 그 간 궁금했던 독자들의 물음에 대한 대답을 내놓지 않으신다. 바로 이 것이 그 대로의 결론인 샘이다.</p><p> 욥기는 결과적으로 등장한 위엄있는 하나님을 통해 독자로 하여금 하나님에 비한 극도의 무지한 나를 발견하게 한다. 결과적으로 욥과 친구들의 대화는 아무런 가치도 신빙성도 지니지 못한 허무한 대화들로 만들어져 버렸고, 하나님이나 나의 고난의 이유에 대한 것을 이해하려는 시도 자체를 허무맹랑한 시도인 것처럼 만들어 버린다.</p><p> 이러한 효과를 통해 욥기는 인생 가운데서 하나님을 원망하려고 하는 모든 시도들이나 목소리를 의미 없는 소리로 만들어 버린다. 결국 인간은 돋보기를 쥔 하나님 앞에 서 있는 아무것도 알 수 없는 개미에 불과한 것이다.</p><p><br /></p><h3>   2) 이 해석의 허점</h3><p> 욥의 결론을 불가지론으로 결론 짓고자 할 때 등장하는 딜레마는 욥기 자체에 있기 보다 그 주제가 가지는 신학적 맹점에 있다.</p><p> 불가지론이란 결국 인간으로써는 알 수 없는 하나님의 절대성에 있다. 그러나 이와 같은 해석은 우리를 애초에 하나님에 대한 논의 자체를 어디까지 할 수 있는가? 에 대한 질문으로 이어진다. 이에 대한 한계점을 자연과학에서 찾는다면, 인간이 자연을 이해하는 폭은 역사를 거듭하면서 소폭 증진되었다. 이에 대한 한계점을 하나님을 이해하는 신학이라는 분야에서 찾는다면, 이 또한 역사와 신학을 거듭하면서 소폭이나마 증진되었다.(분명 3세기의 아우구스티누스보다 21세기의 기민석 박사가 성경과 신학적 세계관을 이해하는 폭이 증진되었음은 분명하다. 왜냐하면 아우구스티누스가 모든 정신과 이성을 다해 연구한 결과를 지금은 수권의 책을 통해 며칠 만에도 습득 할 수 있기 때문이다.) 또한 이런 식의 이성의 한계 증진은 다양한 분야들이 상호 보완 되어 세계관과 하나님, 인간, 우주에 대한 이해들을 넓혀 갔다. 그렇다면 신학적으로 불가지론이 가지는 모순이 드러나기 시작했다. 왜 다 이해할 수 없는 자신에 대해 하나님께서는 역사를 통해서 점점 더 자세한 이해를(비록 소폭이나마) 더하고 계신가?</p><p> 이러한 질문은 좀 더 원칙적인 곳으로 우리를 이끌고 간다. 바로 하나님께서는 왜 조금이나마 자신을 드러내는가? 애초에 다 이해할 수 없는 하나님이라면 자신의 존재성 왜에 자신에 대한 신학을 드러내실 이유가 없다. 왜냐하면 우리 이성의 한계를 뛰어 넘는 이해는 우리로 하여금 궁금증을 유발시킬 수 밖에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성경을 통해 자신을 알라고 강조하고 있다.</p><p><br /></p><blockquote>나는 인애를 원하고 제사를 원하지 아니하며 번제보다 하나님을 아는 것을 원하노라[호세아 6장 6절]</blockquote><p><br /></p><p> 따라서 불가지론은 성경 통합적 공시적 관점에서 신학적 모순성을 가진다.</p><p> 욥기의 내러티브에서 드러나는 하나님의 태도 또한 욥기의 주제를 불가지론으로 바라볼 것에 대한 딜레마를 선사한다.</p><p> 사실 독자들은 욥의 고난의 이유에 대한 원인을 알고 있다. 그 것은 욥기의 전반부에 등장한 내러티브에 있다. 하나님은 사탄의 참소로 인해 욥에게 고난을 선사한다. 이 의도가 욥을 시험해 보고자 함이었든지 사탄의 참소에 반격하기 위해서 였든지 우리는 알수 없지만 결정적 딜레마에 부딧히는 부분은 독자 마저도 알고 있는 그 천상의 회의에 대한 사실을 정작 욥 앞에 등장한 하나님은 숨기고 있다는 것이다.</p><p> 의도적으로 하나님은 독자들에게만 욥의 고난의 원인이 되는 사건을 전달하고 있다. 이는 욥기가 말하고자 하는 주제가 불가지론이라는 주장에 모순된다.</p><p><br /></p><p><br /></p><p><br /></p><h1>Ⅱ. 새로운 신정론 - 권선징악의 탈피</h1><h2>1. 욥기에 등장하는 딜레마들</h2><p style="text-align:center;"><img src="https://saengcrim.com/wp-content/uploads/kboard_attached/6/202604/69cdd85998c1b7590143.png" alt="" style="width:600px;" /><br /></p><p>   1) 외곽틀에서 하나님의 태도 변화 : 욥기 외곽 틀에서 등장하는 하나님이 욥에 대한 태도 변화는 상이하다. 전반부에서는 사탄의 참소 앞에서 욥을 옹호하는 입장이다. 그러나 후반에 등장한 하나님의 욥에 대한 태도는 위험하고 엄격하다.</p><p>  </p><p>   2) 욥은 죄를 인정하지 않음 : 욥은 거듭되는 친구들의 인과응보적 신정론에도 굴하지 않고 자신의 죄를 인정하지 않고 있다. 그러나 후반 욥은 하나님 앞에서 회개를 선포한다.</p><p><br /></p><p>   3) 욥이 죄가 없음을 아무도 모름 : 욥의 죄가 있는지 없는지에 대해서는 심지어 욥 자신 또한 후반에는 혼동하고 있으나 사실 독자는 욥이 죄가 없다는 사실을 전반부의 내러티브를 통해 전제하고 있다. 그러나 이 후 욥기에서는 어디에서도 이를 언급하고 있지 않다.</p><p><br /></p><p>   4) 권선징악의 탈피는 욥기의 결말과 충돌 : 욥기의 주제를 권선징악(응보의 교리)의 부정으로 볼 때 욥기의 결말은 다시 신심과 부의 결부로 이어진다.</p><p><br /></p><p><br /></p><h2>2. 권선징악(응보의 교리)에 대한 고찰</h2><p style="text-align:center;"><img src="https://saengcrim.com/wp-content/uploads/kboard_attached/6/202604/69cdd8d2c4c651282232.png" alt="" style="width:600px;" />   <img src="https://saengcrim.com/wp-content/uploads/kboard_attached/6/202604/69cdd9209917c3331749.png" alt="" style="width:600px;" /></p><p>권선징악(응보의 교리)는 선은 선으로 갚고 악은 악으로 벌하는 전통적 신정론을 말한다. 고대 사회와 현대에 이르기 까지 종교나 철학이 가지는 세계관은 모두 선과 악에 대한 해석과 입장으로 이루어져 있다. 그러나 좀 더 근원적으로 논의해 보자.</p><p> 선과 악은 이분법적인 대치인가? 기독교에서 말하는 하나님은 모든 것의 창조주 이다. 그는 오로지 홀로 존재하시며, 그 이전에 존재했던 존재자는 없다. 그는 모든 것의 근원이시며 모든 것을 창조했다. 만약 악을 그의 창조물이 아니라 그와 대립하고 있는 상대로 본다면 이는 다시 왜 하나님을 선하다고 하고 악을 악이라 부르는지 그리고 왜 선을 좋아하고 악을 미워하는지에 대한 질문이 반복된다. 즉, 선과 악을 대립으로 보는 순간 사실 그 것은 그 선악 위에 있는 또 다른 기준, 선을 좋아하고 악을 미워하는 어떤 절대적 기준을 가정하고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그 존재가 바로 하나님이 되는 것이다.</p><p> 기독교의 하나님은 바로 선 악 그 너머에 계시는 절대적 존재이다. 성경은 악의 기원을 하나님의 창조물에서 기인하고 있다고 전하고 있고, 욥기에서도 사탄은 하나님과 대립하는 적이 아니라 하나님의 명령에 따라 수행할 수 밖에 없는 종속 관계로 그려진다.</p><p> 정리하면, 하나님은 선과 악을 구분짓는 근본이시며, 따라서 선과 악의 지배 아래에 계신 분이 아니시다. 오히려 선과 악은 하나님의 지배 아래에 있다.</p><p>  권선징악이란 선과 악에 따라 심판되는 것을 말한다. 만약 하나님의 신정론을 권선징악의 틀에 가둬놓게 될 경우 하나님은 선과 악의 지배 아래에 놓여지게 된다.</p><p> 하나님은 권선징악의 선과 악 지배 아래에 있지 않다. 하나님은 논의 된 대로 그 위에 계시며, 권선징악에 따라 행동하시는 분이 아니시다. 오히려 그의 주관이 권선징악이 된다.</p><p><br /></p><p><br /></p><h2>3. 피조물의 위치에 대한 고찰</h2><p> 욥기와 우리 인간 아니 나아가 온 우주의 모든 피조물은 하나님의 창조물이다. 창조물이란 어떤 존재인가? 창조물, 다시 말해 피조물은 창조자에 대한 권리를 주장할 수 없다.</p><p> 예를 들어 보자, 내가 어떠한 법칙에 따라 움직이는 장난감 로버트를 창조했다. 그 로버트는 내가 만든 규칙에 따라 장애물이 나오지 않는 이상 앞으로 직진한다. 그 로버트는 내가 만든 내 소유물이므로 아무도 내 허락 없이는 그 로버트가 내가 만든 규칙을 벗어나 행동할 수 있게 하지 못한다. 그러나 내가 내 소유물이자 창조물인 그 로버트를 장애물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만져서 방향을 전환시켰다. 이를 두고 내 창조물인 로버트나 다른 사람이 왜 너는 네가 만든 규칙을 깨고 로버트를 움직였는냐고 말할 수 없다. 그 것은 전적인 나의 주관이며, 심지어 로버트에게 부여한 규칙 또한 나의 주관이기 때문이다.</p><p> 우리는 마치 권선징악의 법칙 아래에 놓여 있거나 인과응보의 규칙 아래에 살고 있다고 생각 할 수 있다. 그러나 하나님은 무에서 유를 창조하신, 다시말해 인과없는 사건을 시작하신 분이다. 인과 없는 창조를 시작하신 창조주 앞에서 피조물이 피조물에게 부여된 일련의 법칙에 속해 있어야 한다고 강요할 수 없다. 또한 창조주가 처음 인과의 법칙 속에 피조물을 창조 했다고 하더라도, 창조주가 언제까지나 그 인과의 법칙 속에서 피조물을 움직여 주고 있다고도 볼 수 없는 것이다. 창조주는 자신의 주관 대로 역사를 주관할 수 있는 주권을 가지고 있다. 우리는 그 주권 아래에 있다.</p><p><br /></p><p><br /></p><h2>4. 우리 안에 내재되어 있는 권선징악(응보의 교리)</h2><p> 인간은 그러나 이러한 권선징악의 교리로부터 탈피할 수 없다. 다시 예로 돌아가 보자.</p><p> 내가 만든 로버트는 내가 세워 놓은 규칙을 떠나 움직일 수도 없고, 내가 세워 놓은 규칙 외에 것이 있다는 것을 스스로 생각해 낼 수 없다. </p><p> 인간이 권선징악의 틀 속에 있다는 근거는 바로 인간이 선 악을 구분할 수 있다는 데에서 기인한다. 인간이 선과 악을 구별할 수 있는 능력은 다만 인간의 한 기능적 측면이 아니라 인간이 생각하는 가장 근본적인 법칙에 속해 있다. 사람은 이 법칙을 떠나서는 아무런 말도 할 수 없다. 우리가 흔히 무엇을 틀렸다고 말할 수 있으려면 우리는 그 것이 틀렸다고 말하는 기준이 있다는 전제를 하는 것이다. 만약 인간이 선과 악에 대한 기준을 가지고 있지 않다면 인간은 ‘거짓말’을 할 수 없다. 칸트의 명제로 말하면 가언적 행동을 할 수 없다.</p><p><br /></p><p> 인간은 이처럼 선과 악의 구분에 대한 기준을 단순히 가지고 있는 것이 아니라 전적인 지배 아래에 있다. 마치 내가 만든 로버트가 내가 만든 규칙의 절대적 지배 아래에 있는 것처럼. 따라서 인간은 세상을 바라보는 모든 관점과 자신에게 이 선악의 기준을 준 어떤 초월적 존재에 대해서도 이 선과 악에 대한 기준을 뛰어 넘어 생각하기 어렵다.</p><p><br /></p><p><br /></p><h2>5. 욥기의 주제 : 권선징악 너머에 계시는 하나님</h2><p style="text-align:center;"><img src="https://saengcrim.com/wp-content/uploads/kboard_attached/6/202604/69cdd9d186c0a4147712.png" alt="" style="width:600px;" /><br /></p><p> 욥기의 초두에 나오는 내러티브는 악을 하나님께 종속된 존재로 묘사한다. 다시 말해 세상의 악 또한 하나님의 주권 아래에 있는 것을 전제한다. 본 내러티브를 통해 독자는 이후 발생하는 욥에게 닥친 모든 고난의 출처가 사실은 사탄이나 욥의 죄가 아니라 하나님의 주권적 명령으로부터 기인함을 전제한다.</p><p> 욥은 고난 가운데로 들어가고, 긴 담화를 통해 신정론과 불가지론에 대한 논쟁을 벌인다. 그러나 욥은 계속해서 자신이 죄가 없음을 호소한다.</p><p> 인간의 근본적인 인식인 권선징악, 선과 악의 틀 안에 세상과 하나님을 바라보고 들었던 욥과 나머지 네 사람들은 끊임없이 스스로를 변호하고 또 하나님을 변호한다. 이들의 모든 대화는 다 선과 악의 틀 안에 있고, 엘리후에 이르러서는 선의 하나님을 변호하고자 하는 엘리후의 최후 변론으로 불가지론이 등장한다.</p><p> 그러나 욥 앞에 등장한 하나님은 그들의 그러한 담화의 틀 너머에 계신 분이심을 드러낸다. 하나님은 선과 악의 틀 너머에 계신 분이시다. 그는 악을 조종하시며, 세상의 역사를 주관하시 되 인간의 경우처럼 선과 악의 이분법 지배 아래에 계신 것이 아님을 스스로 표명하신다.</p><p> 욥은 초두에서 하나님을 권선징악의 틀 안에서 나와 세상을 움직이시는 분으로 이해한다.</p><p><br /></p><blockquote>그들이 차례대로 잔치를 끝내면 욥이 그들을 불러다가 성결하게 하되 아침에 일어나서 그들의 명수대로 번제를 드렸으니 이는 욥이 말하기를 혹시 내 아들들이 죄를 범하여 마음으로 하나님을 욕되게 하였을까 함이라 욥의 행위가 항상 이러하였더라[욥기 1장 5절]</blockquote><p><br /></p><p> 욥은 하나님 앞에서 악을 행하지 않기 위해 부던히 애를 쓰는 사람이었다. 그러나 이러한 욥의 관점은 결코 하나님에 대한 올바른 관점이 아니었다. 사탄은 이를 이용하여 하나님께 참소한다. 사탄의 참소 내용은 다음과 같다.</p><p><br /></p><blockquote>사탄이 여호와께 대답하여 이르되 욥이 어찌 까닭 없이 하나님을 경외하리이까 [욥기 1장 9절]</blockquote><p><br /></p><p> 사탄은 욥기 바로 권선징악의 하나님 관점 아래에 있음을 정확히 꼬집어 이야기 한다. 하나님은 바로 그러한 욥에게 권선징악의 틀에서 벗어난 고난을 명령하신다.</p><p> 욥기의 후반에 등장한 하나님을 통해 욥은 결국 자신과 친구들이 생각했던 권선징악의 틀 아래에 계시는 하나님에 대한 관점으로부터 탈피하게 된다. 그리고 진정으로 선명해진 하나님의 모습을 이해하게 된다.</p><p><br /></p><blockquote>내가 주께 대하여 귀로 듣기만 하였사오나 이제는 눈으로 주를 뵈옵나이다 [욥기 42장 5절]</blockquote><p><br /></p><p> 욥의 이 고백은 하나님에 대한 선명한 관점을 가지게 되었음을 말한다.</p><p> 독자들에게 권선징악 아래에 있는 하나님은 늘 공의롭고 정당한 하나님으로 존경하고 두려워 할 대상일 수는 있다. 그러나 현실의 삶 속에 일어나는 사건들은 철저한 공의성과 권선징악적인 철학으로 이해할 수 있는 사건들은 오히려 많지 않다. 현인들은 세상은 공정하며, 결국 인생은 비스킷 상자이며, 인생사 새옹지마라고 떠들어 대지만, 그런 말들은 고난 속에 있는 사람들에게 위로가 될 수는 있을 지언즉 현실의 인간사를 있는 그대로 투영하고 있지는 않다. </p><p> 즉, 권선징악적인 하나님의 모습은 현실의 삶을 살아가는 독자들에게는 희미하고 귀로 들리기만 하는 하나님인 것이다. 그러나 욥기를 통해 드러난 권선징악 위에 계신 하나님을 이해하게 되었을 때 독자들은 비로소 현실사에 드러나는 하나님에 대한 선명한 모습을 볼 수 있게 된다.</p><p><br /></p><p><br /></p><p><br /></p><h1>Ⅲ. 결론</h1><h2>1. 효과</h2><p> 욥기가 선사하는 권선징악 위에서 세상에 계입하시는 하나님에 대한 관점은 독자로 하여금 절대적 하나님에 대한 무조건적인 기대를 희망할 수 있게 한다.</p><p> 권선징악의 아래에 있을 때 인간이 하나님께 기대할 수 있는 희망은 오직 나의 행위에 대한 자신감에 비례한다. 다시 말해 권선징악의 아래에 계신 하나님에게 인간이 무엇을 기도하거나 바라거나 소망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인간 자신의 자신감에 기인해야 한다는 말이다. 이 말은 인간이 자신의 교만함에 기대하지 않고서는 하나님께 아무것도 희망할 수 없다는 말이다.</p><p> 실제로 인간이 욥처럼 하나님을 경외하고 악에서 떠나 아무런 죄가 없다고 할 지라도 하나님께 구하는 ‘복’의 근거를 자신의 그러한 환경에 기대할 때 그 복은 하나님께로부터 기인한 것이 아닌 선 과악의 기준으로부터 기인한 것이 된다. 욥기는 이러한 행태를 사탄의 입을 통해 참소한다.</p><p> 권선징악 너머에 계시는 하나님은 권선징악 너머에서 그의 피조물들을 조종하실 수 있으신 분이시다. 따라서 인간이 하나님께 무엇이든 얻기를 구한다면, 인간은 권선징악 너머에 계신 하나님께 기대해야 한다. 이는 인간이 무엇을 잘했든 잘못했든과 관계 없이 오직 나를 창조하신 창조자에 대한 기대이며, 사실 이 것은 당연한 현실임을 발견하게 된다.</p><p> 피조물인 인간이 잘못했든 잘못하지 않았든 제1원인자는 피조물을 존재하게 만든 하나님에게 있다. 욥기는 이를 잘 전달하고 있다. 결국 모든 것의 제1원인자를 찾아 올라가면 거기에 하나님이 계신다. 인간의 죄과와 관계 없이 하나님은 인간에 대해 책임질수 있는 주권을 가지고 계신다. 그분은 자신이 세우신 어떤 기준에 따라 인간을 심판할 수도 있고 용서할 수도 있다. 복을 줄 수도 있고 저주를 내리실 수도 있다. 그러나 심지어 그가 세우신 그 기준 또한 그분이 세우신 것임으로 아무도 그 분에게 그 법칙을 강요할 수 없다. 그분에게 그분이 세운 법칙을 강요하는 존재는 오직 그분 자신 밖에 없다.</p><p><br /></p><p><br /></p><h2>2. 욥기의 결론</h2><p style="text-align:center;"><img src="https://saengcrim.com/wp-content/uploads/kboard_attached/6/202604/69cdda7f676863824252.png" alt="" style="width:600px;" /><br /></p><p> 욥기의 결론은 책의 모든 것을 혼란스럽게 만들어 결국 실패한 책으로 만드는 이야기로 맺어진다.</p><p><br /></p><blockquote>여호와께서 욥의 말년에 욥에게 처음보다 더 복을 주시니 그가 양 만 사천과 낙타 육천과 소 천 겨리와 암나귀 천을 두었고 또 아들 일곱과 딸 셋을 두었으며 그가 첫째 딸은 여미마라 이름하였고 둘째 딸은 긋시아라 이름하였고 셋째 딸은 게렌합북이라 이름하였으니 모든 땅에서 욥의 딸들처럼 아리따운 여자가 없었더라 그들의 아버지가 그들에게 그들의 오라비들처럼 기업을 주었더라 그 후에 욥이 백사십 년을 살며 아들과 손자 사 대를 보았고 욥이 늙어 나이가 차서 죽었더라 [욥기 42장 12-17절]</blockquote><p><br /></p><p> 욥이 다시 받은 것과 같은 복은 사실 이전의 욥기 내용과 인과관계를 암시하는 어떤 수식어도 나오지 않는다. 독자들은 은연중에 욥이 말년에 받은 복이 다시 욥의 어떤 선한 행위의 결과로 인한 것으로 여기게 되는 회귀를 방지하기 위한 결론이다.</p><p> 욥기를 통해 드러난 인과응보 너머에 계시는 하나님을 보았음에도 독자들은 욥이 다시 받은 복을 보며 다시 인과응보의 규칙 안에 계시는 하나님으로 회귀하려고 한다. 그러나 욥기는 이를 방지하고자 독자들에게 마지막 질문을 던져주고 있는 것이다.</p><p>  지금까지 논의를 바탕으로 욥의 전개 구조를 보면 다음과 같다.</p><p><br /></p><p><span style="font-size:24px;"><b> 1) 욥은 큰 복을 누리고 있었고, 이를 자신이 하나님을 경회하였기 때문으로 이해하였다.</b></span></p><p><span style="font-size:24px;"><b> 2) 세상을 돌아다닌 사탄은 현실주의자이며, 욥의 이러한 하나님에 대한 이해가 현실성이 없다는 점을 참소한다.</b></span></p><p><span style="font-size:24px;"><b> 3) 권선징악 너머에 계시는 하나님은 욥에게 인과 없는 고난을 내린다.</b></span></p><p><span style="font-size:24px;"><b> 4) 욥과 등장인물들은 욥의 고난을 두고 인과관계를 권선징악의 하나님 아래에서 찾는다.</b></span></p><p><span style="font-size:24px;"><b> 5) 엘리후의 등장으로 권선징악 아래에 있는 하나님에게서는 인과를 찾을 수 없음을 결론짓는다.</b></span></p><p><span style="font-size:24px;"><b> 6) 하나님께서 등장하여, 권선징악의 너머에 있는 모든 것의 창조주임을 알려주신다.</b></span></p><p><span style="font-size:24px;"><b> 7) 욥의 고난은 결과적으로 권선징악 아래에서 일어난 일이 아니었다.(친구들의 실패)</b></span></p><p><span style="font-size:24px;"><b> 8) 욥은 다시 복을 받는다. 그러나 이 복은 과연 욥이 잘해서 받은 것인가?(다시 독자들에게 질문)(1장의 욥에게 던지는 질문)</b></span></p>]]></description>
			<author><![CDATA[숲지기]]></author>
			<pubDate>Mon, 17 Mar 2025 11:58:00 +0000</pubDate>
			<category domain="https://saengcrim.com/?kboard_redirect=6"><![CDATA[숲지기 블로그]]></category>
		</ite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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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CDATA[Re:1:1 문의]]></title>
			<link><![CDATA[https://saengcrim.com/?kboard_content_redirect=331]]></link>
			<description><![CDATA[<strong>1. 종교란 무엇일까?</strong>
신앙이란 무엇일까요? 종교란 무엇일까요? 현대에 와서는 유물론적 사고에 젖어 단지 마음의 수양이나 행복한 삶을 위해 종교를 갖는 유물론적 종교인들도 꽤 있는 것이 사실입니다. 그러나 그건 단지 교양활동이나 웰빙활동으로 하는 하나의 활동일 뿐입니다. 실제 신앙인이라고 볼 수는 없지요. 그렇다면 본질적으로 종교는 왜 있으며, 사람들은 무엇 때문에 신앙인이 될까요? 그것은 바로 '신'과의 '커뮤니케이션' 입니다.
어느 종교든지 '신'이 있습니다. 물론 유교 처럼 '신'이라고하는 뚜렷한 개념이 없는 이신종교도 있습니다. 그러나 어쨌든 '신'이라고 하는 존재는 모든 종교가 상정하고 있는 개념입니다. '신'이 없는 종교행위는 단지 하나의 문화의식이나 형식에 불과함으로 종교라고 할 수 없지요. 이처럼 종교는 '신'이라고 하는 존재를 상정하고, 그 '신'과 어떤 식으로든 대화하거나, 그 신에게 귀의 하거나, 신을 만족시켜 원하는 것을 얻거나, 신에게 궁금한 것을 물어보거나, 신으로 부터 기적을 얻어내거나 혹은 기적을 경험하길 원하거나 하는 모든 활동이 있습니다. 다시말해 종교란, '신'이 있는데, 그 '신'과 모종의 커뮤니케이션을 하는 방법을 정해놓은 것 입니다. 그리고 종교활동이란 그 방법을 수행하며 사는 것 이지요. 불교나 인도종교의 경우 수행을 통해 신께 귀의하려고 하는 종교 입니다. 이슬람이나 유대교는 신이 정해 놓은 규율을 지킴으로 신으로 부터 무죄 판결을 받으려고 하는 종교 입니다. 무당이나 점성술 같은 경우 어떤 의식등을 통해 신으로 부터 궁금한 것에 대한 대답을 듣는 종교라고 볼 수 있지요. 이처럼 종교라고 하는 것은 신과의 커뮤니케이션 방법론 입니다. 그렇다면 기독교는 어떨까요?

<strong>2. 기독교의 본질은 무엇인가?</strong>
기독교의 본질은 '구원'에 있습니다. 기독교는 모종의 조건(믿음)을 통하여 신(하나님)께서 예비해 놓으신 천국에 도달하여 영생을 누리는 것을 궁극적인 목표로 봅니다. 따라서 기독교는 이 땅에서의 삶은 잠시 잠깐 지나가는 삶이며 구원받은 성도의 궁극적인 본향과 진정한 인생은 죽음 이후 '내세(천국)'이라고 믿습니다. 물론 구원에 대한 개념이 다른 종교들에도 있습니다. 당연히 신을 상정하고 있는 종교에서는 죽음 이후에 대해 대답해야 할 의무를 지니고 있지요. 따라서 모든 종교에는 구원관이 포함되어 있으나 구원이 핵심인 종교는 그리 많지 않습니다.(기독교를 제외하고는 페르시아의 조로아스터교나 몇몇 이단들이 있을 것 입니다.) 거의 모든 종교는 구원을 본질로 두고 있지 않습니다. 현제의 삶이나 선한 행위, 혹은 수행, 혹은 모종의 의식들 등에 그 종교의 본질이 있지요. 이러한 차이는 구원이라고 하는 것을 '은혜'로 얻는다고 하는 기독교의 아주 독특하고 유일한 구원관 때문에 생깁니다. 다른 모든 종교에서 '내세'는 현세에 내가 어떻게 살았느냐에 따라 결정되는 결과에 불과 합니다. 따라서 중요한 것은 내세가 아니라 현세가 중요해 집니다. 그러나 기독교는 '내세'의 구원이 믿음으로 말미암아 은혜로 주어집니다. 따라서 중요한 것은 현세가 아니라 내세의 소망이 중요해 지며 따라서 기독교의 본질은 '구원론'에 있게 됩니다.

<strong>3. 기독교의 세계관과 이 세상의 불완전성</strong>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세상은 멸망할 세계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분명히 다시 오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성경은 거듭해서 이 세계의 종말과 영원히 하나님과 동행하는 천국이 예비되었음을 이야기 하고 있습니다. 이 세상은 악에 빠졌으며, 인간은 이 세상에서 온전히 의롭게 살수 없습니다. 따라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대속으로 인한 은혜의 죄사함이 아니고서는 어떠한 인간도 완전한 선이신 하나님 앞에서 선하다고 인정 받을 수 없으며, 따라서 구원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은혜로 주어질 수 밖에는 없습니다.
이 세상에 죄에 빠졌으며 불완전하다는 말을 논리적으로 증명해 봅시다. 내가 하는 말이나 행동에 거짓이 없고, 가식이 없으며, 숨은 목적이나 의도가 없을 때 우리는 그 말이나 행동을 선하다고 합니다. 이 것을 조금 어려운 말로 '정언명제'라고 합니다. 예를 들어 '내가 이웃을 도왔다.'라고 했을 때, 내가 이웃을 도운 숨은 의도(예:돈을 꾸려고..)가 없고, 그 행동이 정직했을 때 우리는 이를 '정언명제'라고 합니다. 반대로, 내가 한 말이나 행동이 거짓되거나, 숨은 의도나 목적이 있을 때 우리는 그 말이나 행동을 악하다고 합니다. 이 것을 조금 어려운 말로 '가언명제'라고 합니다. 예를들어 '내가 돈을 꾸려고 잘보이기 위해 이웃을 도왔다.'라는 것은 사실 그 이웃을 도운 행동과 그 행동의 주체자인 나의 본심이 일치하지 않습니다. 따라서 이를 '가언명제'라고 합니다. 그런데 우리는 이 땅에서 절대로 온전히 '정언명제'만을 행하고 살 수 없습니다. 왜 그 것이 불가피 한지 유명한 예를 하나 들어 보겠습니다.
[나무꾼이 나무를 하던 중 사슴이 나타나서 나무꾼에게 말했습니다. "사냥꾼이 저를 쫓아 옵니다. 저를 좀 숨겨 주실수 있으신가요?" 그래서 나무꾼이 "내가 너를 숨겨주기로 약속하마!"라고 말하고 나뭇더미 안에 사슴을 숨겨주었습니다. 잠시 후 사냥꾼이 나타나서 나무꾼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혹시 사슴을 보았소? 솔찍하게 말해주시오.." 자, 이 때 나무꾼이 사냥꾼에게 사슴을 보지 못했다고 한다면 이는 사냥꾼에 대한 가언명제 입니다. 그리고 솔찍하게 사슴을 보았다고 말한다면 사슴에 대한 가언명제 입니다. 나무꾼은 가언명제 왜에는 선택의 도리가 없습니다.]
이 예를 통해 들어나는 가언명제의 불가피성은 '정언과 정언이 충돌할 때는 대안이 없다.'입니다. 왜 이러한 현상이 발생할까요? 그 이유는 나무꾼이 사슴을 잡으려고 하는데 사슴은 원하지 않는 상황 때문입니다. 즉 '가언적상황'이 결국 나무꾼으로 하여금 가언명제를 행할 수 밖에 없게 만드는 것 입니다.
논리의 결과는 이렇습니다. 우리가 '온전히 선하게' 살기 위해서는 우리 주변의 모든 상황 또한 '온전히 선하기만' 해야 가능합니다. 그러나 이 땅에서는 '온전히 선하기만 한' 사람들만 살지 않습니다. 악한 사람과 악한 상황들이 존재 합니다. 따라서 이 땅에서 우리가 온전히 선하게만 사는 것은 불가능 하며, 이로써 기독교의 전제인 '인간은 이 땅에서 온전히 의롭게 살 수 없다.'는 것이 증명됩니다.

<strong>4. 외국인과 맛집</strong>
기독교는 이 세상에 거짓과 악이 존재한다는 것을 터럭만큼도 부정하지 않습니다. 그 때문에 기독교의 본질은 구원론에 있으며, 그 구원 또한 인간의 어떤 행위가 아니라 전적인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에 의한 은혜로 주어집니다.
이제 다음과 같은 예를 한번 들어 봅시다.
[한 외국인이 한국의 비빔밥에 대한 이야기를 전해 들었습니다. 그 외국인은 비빔밥을 맛보겠노라고 한국을 방문했습니다. 그 외국인이 기대감을 가지고 한 비빔밥 식당에 들어갔습니다. 그리고 그 식당에서 비빔밥을 맛보기 시작했습니다. 그런데 그 식당은 사실 그다지 맛있는 집이 아니었습니다. 아마도 백종원의 골목식당에 나왔다면 백종원 아저씨에게 크게 혼났을 법한 그런 식당이었던 것입니다. 심지어 서비스나 위생상태도 엉망이었지요. 그러나 그 외국인은 그 식당이 맛있는 식당인지 아닌지 구별할 재간이 없습니다. 외국인은 기대감을 가지고 비빔밥을 맛보았지만 다 먹고 난 뒤 실망합니다. '이게 비빔밥이었다니,, 내가 들은 이야기는 아주 맛있는 환상적인 맛이라고 들었는데! 이건 맛없는 개밥 같구나..식당도 너무 더러워..!' 그리고 외국인은 이제 한국을 떠날 생각을 하기 시작했습니다..]
이러한 외국인을 만났다면 어떻게 하고 싶은 생각이 드나요?? 저라면 이렇게 이야기 할 것입니다. "아니 비빔밥이 맛이 없었다고요?? 분명 당신은 맛없는 집에 간 것이 틀림없습니다! 사실 비빔밥을 제대로 맛보려면 비빔밥을 제대로 하는 한정식집에 가야해요! 당장 따라 오세요! 제가 진짜 비빔밥의 맛을 맛보게 해드리지요! 여기까지 와 놓고 이대로 그냥 돌아가면 안됩니다..!!"

<strong>5. 맛집 비유의 해석</strong>
기독교의 본질은 구원론에 있습니다. 그리고 그 구원은 은혜이고, 하나님의 측량할 수 없는 사랑을 필연적으로 요구합니다. 그 구원과 사랑을 진정으로 맛본다면, 감격하지 않을 수 없고, 기뻐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런데 만약 어떤이가 교회를 다니기 시작하고, 교회의 사람과 매스컴에서 나오는 목사들의 범죄에 실망하여 교회를 떠날 생각을 하고 있다면, 맛없는 비빔밥에 실망하기만 하고 한국을 떠나려고 하는 외국인과 다르지 않습니다. 비빔밥의 본질은 싱싱한 재료와 장국의 맛과 고추장 양념의 맛에 달려 있습니다. 만약 정말 제대로 된 비빔밥을 먹고도 비빔밥이 맛이 없다고 말할 인간은 없다고 자부합니다! 기독교 그렇습니다. 제가 아는바 하나님은 너무너무 매력적인 분이셔서 시간을 두고 알아가면 알아갈 수록 절대로 그 매력에 빠지지 않을 수 없는 분 입니다. 입으로는 그분을 믿는다고 말하면서 가식적인 종교생활을 하는 사람들이나 진정으로 그분을 믿지만 이 세상의 불완전함 때문에 그리고 육신의 연약함 때문에 여전히 때때로 죄의 유혹에 넘어가고 있는 사람들은 결코 기독교의 본질이 아닙니다. 더군다나 만약 다녔던 그 교회에 그런 사람이 많았다면 더더욱 엉터리 비빔밥 식당을 찾아간 샘 입니다.
그리스도인은 공동체에서 함께 예배하고 교제합니다. 그러나 그 공동체 중에는 맛집도 있고, 엉터리 식당도 있습니다. 내가 지금 다니고 있는 교회가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이나 천국의 소망이나 구원 받은 은혜에 대한 감격과 기쁨이 없고, 성도간의 사랑이 전혀 느껴지지 않는 교회라면 우리는 분별하여 그 교회를 나와 건강하고 성령이 넘치는 교회를 찾아 나서야 합니다. 몇번 맛없는 비빔밥 식당을 돌아보고 '비빔밥이 다 이렇구나.'라고 실망해 버린다면 이처럼 애석한 일이 없지요..

<strong>6. 결론</strong>
구원의 감격과 사랑이 넘치는 교회를 다시 한번 찾아 보시기를 간곡히 바랍니다. 그리고 기독교의 본질인 구원과 하나님에 대해 맛보시기를 부디 부탁드립니다. 비빔밥이 무엇인지 정말로 안다면, 비빔밥이 결코 맛이 없다고 말할 수 없습니다. 구원의 감격과 하나님의 무한한 사랑을 발견한다면, 결코 지금 한국 교회에 비춰지고 있는 안타까운 교회의 현실에도 기독교에 대해 실망할 수는 없습니다. 한가지 어려운 점은 요즘은 정말 맛집 찾기가 어려워 진 것 처럼(제가 어릴 때는 어느 식당을 가도 왠만하면 다 맛있었는데 말입니다..;;;) 성령과 사랑이 넘치는 교회 또한 찾기가 어려워 진 것은 사실이긴 합니다. 한국 교회의 안타까운 현실이지요. 그러나 비빔밥의 맛을 안다면 맛집이 없는 식당들에 실망할 지언정 비빔밥에 실망할 수는 없는 법 입니다. 우리는 어떻게든 맛집을 찾아 냅시다.
맛을 잃어버린 식당을 떠나 새로운 단골맛집을 찾아나섭시다. 하나님께서는 분명 좋은 교회로 인도해주시리라 확신합니다. 우리는 다시금 예수 그리스도의 구원의 감격에 기쁨과 은혜의 눈물을 흘리게 될 것 입니다! 우리는 다시금 '그래 이맛이야!!'라고 외치게 될 것입니다..(저도 기도 하겠습니다.)]]></description>
			<author><![CDATA[숲지기]]></author>
			<pubDate>Wed, 12 Mar 2025 09:11:46 +0000</pubDate>
			<category domain="https://saengcrim.com/?kboard_redirect=1"><![CDATA[익명 Q&A]]></category>
		</item>
				<item>
			<title><![CDATA[1:1 문의]]></title>
			<link><![CDATA[https://saengcrim.com/?kboard_content_redirect=330]]></link>
			<description><![CDATA[안녕하세요. 교회를 다닌지 몇년째 된 사람입니다.
남들과 달리 늦게(대학교 졸업즈음)교회를 오고나서 예수님을 만나 지금까지 신앙생활을 하고 있습니다.
저는 애초에 신이 있다고 생각해왔고 교회를 오면서 그 신이 예수님이라 확신했었습니다.
그러나 지금 제 자신은 신앙이 없습니다. 교회에 대한 어떤 것도 믿어지지 않습니다.
왜 신앙이 사라졌는지 근원적인 이유는 솔직히 모르겠습니다. 다만 교회 지체들에 대한 기대가 실망으로 변했고, 몇몇 한국교회와 목사님들의 모순적인 모습을 보면서 실족해왔습니다.
또한 교회에서 사적인 일로 상처도 많이 받았습니다. 그래서인지 저에겐 일종의 편견이 생겼습니다.
교회사람들이 위선적으로 보이고, 겉과 속이 다른 존재라고 밖에 여겨지지 않습니다. 그들이 그저 밉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교회를 떠나게 되면 지금까지 다녔던 시간이 무의미해지고, 공허한 날들을 맞이해야한다는 두려움이 있습니다.
그래서 아직까지 공동체를 떠나지 못하는것 같습니다.
그들과 동화되지 못한 채 홀로 소외된 느낌을 받고, 더이상 교회에서 아무런 감각도 느끼지 못하는 제 삶이 너무나 한탄스럽습니다.
지금은 그저 용기를 내어 교회를 떠날 생각만 하고 있습니다.
이런 제게 다른 방안이 있는 것인지, 이런 제가 다시금 예수님을 만날 수 있긴 한 것인지 궁금합니다.]]></description>
			<author><![CDATA[박질문]]></author>
			<pubDate>Tue, 11 Mar 2025 09:10:59 +0000</pubDate>
			<category domain="https://saengcrim.com/?kboard_redirect=1"><![CDATA[익명 Q&A]]></category>
		</item>
				<item>
			<title><![CDATA[Re:1:1 문의]]></title>
			<link><![CDATA[https://saengcrim.com/?kboard_content_redirect=329]]></link>
			<description><![CDATA[<strong>1. 미래는 결정되어 있는가?</strong>
우리가 흔히 교회를 다니며 생각하는 하나님은 우리의 미래를 다 알고 계시는 하나님 입니다. 그래서 때때로 예언하시기도 하시며, 미리 예비 해 놓으시기도 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흔히 오해하곤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미래를 모두 알고 있는 만큼 우리의 미래는 사실 결정되어 있다고 말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오해는 하나님 또한 우리 처럼 시간의 흐름 속에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생기는 오해 입니다. 하나님께는 회전하는 그림자가 없으십니다. 그분 자체가 빛이시고, 그 빛은 조금도 흐려지지 않는 변함없는 빛 입니다.

<strong>2. 시간이란?</strong>
그렇다면 시간이란 무엇일까요? 우리는 바나나를 보고 '바나나'라는 단어로 이름붙였습니다. '시간'이라고 하는 단어도 인간이 만든 단어 입니다. 그렇다면 인간은 무엇을 '시간'이라고 이름 붙인 것 일까요? 그것은 바로 '변화'입니다. 세상의 거의 모든 것들은 끊임없이 변화합니다. 태양은 아침에 떠서 저녁에 집니다. 여름은 지나가고 가을이 오고 이어서 겨울이 옵니다. 생명은 자라나고 또 늙습니다. 혹은 이런 변화도 있습니다. 축구공을 내가 발로 찼더니 여기에서 저기로 변화했습니다. 짐을 옮겼더니 짐의 위치가 변화했습니다. 내가 걸어갔더니 나의 위치가 변화했습니다. 이와 같은 변화들을 보고 인간은 '시간이 흘렀다.'라고 표현했습니다. 시간이라고 하는 선이 흐름에 따라 어떤 것이 변화한다고 묘사한 것 입니다. 이러한 묘사 때문에 '시간'이 마치 독립된 어떤 것인 느낌이 들기도 하지만 사실 '변화' 그 자체가 '시간' 입니다. 아무 것도 없는 텅빈 우주를 한번 상상해 봅시다. 그 우주에도 시간이 있을까요? 있다고 생각이 들수도 있지만 그건 생각하는 우리의 의식이 만들어 내는 시간일 뿐이지 정말 그런 텅빈 우주가 있다고 한다면 그 우주에는 시간이라고 정의할수 있는 아무런 '변화'도 없습니다. 그렇다면 과거와 현재와 미래를 어떻게 구분할 수 있을까요? 구분할 수 없습니다. 그 텅빈 우주에는 '변화'가 없으며 따라서 '시간'도 없습니다. 시간은 '변화'하는 양상을 보고 이름 붙인 말 입니다.(현대의 1초라는 물리적인 시간은 세슘원자가 9,192,631,770번 진동하는 변화를 1초로 정의합니다.)

<strong>3. 하나님에게 시간은 있는가?</strong>
앞서 우리가 알아본 '시간'이라고 하는 것은 '변화'를 두고 붙인 개념이라는 것을 살펴봤습니다. 그렇다면 하나님께도 '시간'이 있을까요? 이 말은 "하나님께도 '변화'가 있을까요?" 라는 말로 바꿔서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우리는 정답을 이미 알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변화하지 않으십니다.(지난번 질문에서 이미 살펴 보았습니다^-^*) 따라서 하나님께는 '시간'이라고 하는 것을 이름 붙일 어떤 것도 없습니다. 하나님께는 시간이 없습니다.

<strong>4. 미래는 결정되어 있는가?</strong>
과거와 현재 그리고 미래를 생각해 봅시다. 우리는 SF영화나 소설에서 '타임머신'이라는 기계를 상상하곤 합니다. 기계를 타고 과거든 미래든 여행하는 것이지요. 그러한 영화에서는 과거와 미래가 '존재'하고 있습니다. 마치 시간이라는 것이 길게 늘어져 있는 선과 같아서 그 선에서 점프할 수만 있다면 과거도 미래도 갈 수 있다고 생각하지요. 그러나 이러한 상상에는 모순이 존재합니다. 시간이 만약 선과 같이 늘어져 있는 것이라면, 우리는 단지 이미 모두 결정되어 있는 그 시간의 선을 순서대로 지나가며 살고 있는 것이며, 우리에게 그 어떤 자유의지나 선택의 권리 혹은 우리의 갈등 더 나아가 인격까지 모두 있을 수 없습니다. 이 세상은 단지 기계적으로 움직이는 시스템에 불과하며 우리도 그 기계의 일부에 불과합니다. 결정에 따라 움직이는 기계시스템에 인격이나 자유가 있을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에게는 분명히 선택의 자유와 인격이 존재합니다.
정리하자면, 미래가 결정되어 있다고 한다면 우리에게 인격이나 자유의지가 있을 수 없습니다. 그런데 우리에게는 고민하는 인격과 선택의 자유가 분명 존재합니다. 따라서 모순이 생깁니다.
우리는 비디오테이프에 따라서 재생되고 있는 존재가 아닙니다. 우리는 분명 의식과, 인격과, 자유의지가 존재합니다. 우리는 '변화'에 대한 일련의 통제권을 가지고 있습니다. 우리는 결정된 미래의 흐름을 따라가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 뿐만 아니라 이 세계 전체가 그렇습니다.
과거와 미래라는 말은 우리가 지나간 시간과 아직 오지않은 시간을 부르는 말입니다. 그러나 그러한 말이 있다고 해서 실제로 과거가 지금도 실제하며, 미래가 지금도 실제하여 타임머신만 있다면 그리로 가거나 올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과거와 미래는 실제하지 않습니다. 이 세상에는 오직 '변화'의 그 최종적인 끝인 '현재'만 존재합니다. 과거와 미래는 '지나간, 아직 오지 않은'이라는 의미에 불과합니다. 이 세계는 '변화'하면서 현재를 만들어가고 있습니다.

<strong>5. 하나님과 미래</strong>
그렇다면 하나님께는 어떨까요? 앞서 살펴 보았듯이 하나님께는 '시간'이 없습니다. 따라서 우리가 경험하고 또 우리와 관계하시고 또 우리에게 말씀하시는 하나님은 우리가 속한 시간에 관여하고 계신 것 입니다. 우리가 소설을 쓴다고 가정해 봅시다. 우리는 작가로써 소설 속의 주인공에게 관여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 때는 소설속 주인공의 '시간' 속에서 관여하는 것 입니다. 우리가 소설 속 주인공에게 어떤 말을 해주는 장면을 쓰고 있다고 할 때 우리의 그 말은 소설속의 주인공에게 그 주인공의 시간 속에서 들려지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말을 반쯤 쓰고 한시간 쉬었다가 나머지를 썼다고 하더라도 소설 속 주인공의 입장에서는 당연히 우리가 한시간 쉬었다가 말한 것으로 여겨지지 않지요. 이처럼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관여하실 때도 마찬가지 입니다. 하나님은 당연히 우리의 시간 속에 들어오셔서 우리에게 말씀하시고 관여하실 수 밖에 없습니다.(저는 지금 사실 당연한 말을 어렵게 설명 하고 있는 것 입니다...^^;;)
하나님께는 시간이 없습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관여하실 때는 우리의 시간속에서 관여하고 계신 것 입니다. 그런데 우리의 시간에 과거나 미래따위는 실제하지 않습니다. 그렇다면 하나님께는 미래가 있다고 볼 수 없지요. 하나님께는 시간이 없으므로 미래는 당연히 없습니다. 우리에게도 미래는 실제하지 않는데 도대체 하나님께서 미래에 계신다고 어떻게 말할 수 있단 말입니까?
'하나님께서 우리의 미래에서 예비하고 계신다.'라는 말은 하나님께서 지금도 우리와 함께 하시듯 미래에도 함께 하실 것이 확실하다는 말이지 미래가 실제하여 하나님께서 거기에 기다리고 계신다는 뜻이 될 수 없습니다. 하나님께서는 현재 지금 우리와 함께 계속 계십니다. 하나님의 예비하심은 그분의 지혜로 인해 가능하며, 하나님의 예언은 그분의 변함없는 의지를 말합니다.(ex. 내가 꼭 다시 오리라!)

<strong>6. 하나님은 다윗에게 싸움의 결과를 알려주셨는데 그 것은 무엇?</strong>
인간의 아무리 커다란 사건도 하나님이 함께하시면 어려울 것이 무엇이 있겠습니까? 인간이 아무리 지혜를 짜 낸다고 한들 하나님의 지혜에 비하면 어리석음이지 않겠습니까? 성경에서 하나님께서 일의 결과를 알려주시는 것은 하나님께서 함께하신다는 의미이지 이미 결정되어 있는 미래를 알려주시는 의미이지 않습니다. 우리는 그렇게 오해하면 안됩니다.

<strong>7. 우리도 결과를 물어봐야 할까? 아니면 과정 가운데 소망을 가지고 나아가야 할까?</strong>
결과를 물어 본다는 것은 말 그대로 하나님께서 이 일에 나와 함께 하실 것인지를 물어보는 것 입니다. 다른말로 바꾸자면 하나님의 뜻을 물어보는 것이지요. 우리는 날마다 하나님의 뜻을 물어보고 또 더 나아가 나의 뜻과 소원을 말하면서 하나님과 대화하는 일을 해야 합니다.(다윗처럼!) 당연히 우리도 일의 결과를 물어볼 수 있어야 합니다.
또한 꼭 결과를 모르겠을때에도 과정 가운데 하나님께 소망을 두고 물어물어 갈수도 있습니다. 어떤 경우에는 하나님께서 꼭 원하신다는 생각은 들지 않더라도 내가 원하기 때문에 결과를 하나님께 맡기고 나아갈수도 있습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길을 열어주시기도 하십니다.
왜 이와 같이 양립적인 대답을 할 수 있을까요? 그 이유는 앞서 살펴 보았듯이 '결정되어 있는 미래'는 없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우리에게도 그리고 하나님께도 마찬가지입니다. 결정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 단지 하나님께서 지금 나와 함께 하실 것인가? 혹은 내 지혜 보다 하나님의 지혜를 구할 것인가? 하는 것입니다.

<strong>8. 선택과 계획의 문제, 어떻게 해야 하는가?</strong>
신앙서적과 설교를 통해 하나님의 뜻을 분별하는 다양한 의견들이 제시됩니다. 뭐 음성을 들어야 한다 혹은 말씀의 증거를 받아야 한다 혹은 영적 지도자의 승인이 있어야 한다 혹은 세번 이상의 동일한 싸인이 있어야 한다 등등 여러가지 이야기들이 있지만 사실 인생에는 꼭 커다란 선택만 있는 것이 아니라 소소한 선택까지 매우 다양하고 빈도수 높은 선택의 순간들이 있습니다. 그런데 그 선택의 순간들 마다 이러한 방법들을 사용하기란 현실성이 매우 떨어집니다. 그리고 두서없기도 하지요... 이와 같은 방법들이 꼭 나쁘다 혹은 어느것이 맞다라고 이야기 할 수는 없습니다. 모든 방법들이 다 선하고 또 때때로 실제 유용하기도 하지요. 그러나 우리가 하나님의 뜻을 분별함에 있어서 명확하게 전제해야하는 개념이 있습니다.
그 개념은 바로 "하나님은 내 안에 계신다.(Where is God? In my Heart.)"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 안에 계십니다.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성령을 받은 우리의 영혼 속에 존재하십니다. 거듭남으로 말미암아 우리의 인격과 하나되어 존재하십니다. 그분은 교회에, 하늘에, 성경 속에, 내 옆에, 미래에, 과거에, 영적인 특별한 사람에게, 존재하시는 분이 아니십니다. 그분은 바로 내 안에 계십니다.
하나님께서 내 안에 계신다는 것을 알고 나면 하나님의 뜻이 가장 선명하고 뚜렷하게 드러나는 곳이 어딜지 금방 생각해 낼 수 있습니다. 그 곳은 바로 나의 마음입니다.

예레미야 31장 33절
그러나 그 날 후에 내가 이스라엘 집과 맺을 언약은 이러하니 곧 내가 나의 법을 그들의 속에 두며 그들의 마음에 기록하여 나는 그들의 하나님이 되고 그들은 내 백성이 될 것이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하나님의 뜻은 이제 우리 마음에 있습니다. 하나님이 여기에 두셨습니다.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 우리 밖에서 아무리 찾으려고 애써봐야 늘 의심스러운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의 뜻이 우리 마음에 있다는 말은 무슨말일까요? 음성을 들어야 한다는 의미인가요? 하나님은 우리 안에 독립적으로 존재하시지 않고, 우리와 하나되어 존재하고 계신다는 것을 기억하십시오.

빌립보서 2장 13절
너희 안에서 행하시는 이는 하나님이시니 자기의 기쁘신 뜻을 위하여 너희에게 소원을 두고 행하게 하시나니

우리의 마음에 하나님의 뜻이 있다는 것은 바로 우리의 소원함에 하나님의 뜻이 있다는 것 입니다. 다시말해서 하나님은 우리로 하여금 '하고싶게' 만드신다는 것 입니다. 요나서를 살펴 보면 이를 잘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요나에게 니느웨에 가서 회개를 선포하라는 명령을 하십니다. 그러나 요나는 이를 원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다시스로 갔지요. 그런데 가는길에 요나는 물고기 뱃속으로 들어가게 됩니다. 그리고 요나는 니느웨로 가기로 마음을 바꾸지요. 이 이야기를 인간의 입장에서만 보면 마치 하나님 말을 듣지 않은 요나가 벌받고 정신차리는 것 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가만히 살펴보면 하나님께서는 '다시스로 가는배' 혹은 '풍랑' 혹은 '커다란 물고기'등을 사용하셔서 요나의 마음을 돌리고 계신 것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결코 요나의 마음을 강제로 억누르고 그저 순종하기만을 기대하고 계시지는 않았다는 걸 알 수 있지요. 하나님은 "너의 의지와 생각과 주장을 꺾고 나의 명령에 무조껀 복종하라!!"라고 말씀하시는 폭군이 아니십니다. 그분은 터무니 없는 나의 고집일지라도 나의 의견과 주장을 존중하시고, 대화하기를 원하시고, 그래서 내가 마음을 돌일 킬 수 있도록 설득하시고, 때때로 오히려 내 고집 편을 들어주시기도 하시는 아주 자상한 아버지십니다. 폭군이 아니고, 아버지십니다.
자주자주 우리는 우리의 진짜 원함이 무엇인지도 잘 모를때가 많습니다. 아이들은 자신들이 진짜로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혼동합니다. 그래서 엉뚱한 것을 고르지요. 우리도 하나님 입장에서는 그럴 수 있습니다. 그래서 선택과 계획에 앞서 가장 먼저 하나님과 이야기 나눠야 할 부분은 '진짜 내가 원하는 것이 무엇일까요 주님?'입니다. "내가 진짜로 지금 원하는 것이 무엇이지요..?"라고 먼저 묻고 진솔하게 나의 상황과 또 나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면 어느새 내가 정말로 원했던 것이 무엇이었는지가 서서히 드러나고, 그렇게 발견된 소망은 때때로 우리의 가슴을 설레게 하기도 합니다.

<strong>9. 결론</strong>
현재를 삽시다. 하나님은 미래에 계시지도 과거에 계시지도 않습니다. 하나님은 지금 바로 여기 내 안에 계십니다. 날마다 하나님께 기도합시다. 기도를 꼭 무릎꿇고, 두손모으고, 시간을 정해서 해야 한다고 생각하는 것은 대단히 큰 오해 입니다. 결혼해서 늘 함께하는 부부는 시간을 정해서 카페에 가지 않아도 언제든지 하고 싶을 때 어떤 상황에도 대화할수 있습니다. 지금 나와 하나님은 부부보다 더 가까이 붙어있습니다. 무려 내 안에 계시지요. 내가 그분께 말을 걸면 안되는 거룩하지 못한 상황이란 존재하지 않습니다. 심지어 우리가 죄를 저지르고 있을 때에도 그분과 대화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분의 물리적인 '음성'에 집착하는 것 또한 큰 오해입니다. 물론 때때로 하나님은 물리적인 음성을 들려주시는 기적을 배푸실 때도 있습니다. 그러나 왜 궂이 그런 방법을 자주 쓰겠습니까? 침대에서 바로 옆에 함께 누어있는 부부가 대화를 위해 전화를 거는 모양은 좀 낭비라는 생각이 들지 않습니까? 하나님께 기도하며 말을 걸 때 하나님께서 나와 대화하시는 방법은 나의 생각을 넓히시고, 지혜를 더하시고, 소원을 발견하게 하시고, 진정으로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깨닫게 하시고, 긍휼한 마음을 주시며, 기쁨을 주시고, 감동을 주십니다. 하나님은 내 마음에 계십니다. 가장 쉽고 또 당연한 방법은 나에게 생각과 마음이 들게 하는 것 입니다.
이제 우리가 다윗이 되어 봅시다. 전쟁을 앞에 두고 하나님께 기도합니다. "하나님 제가 진짜로 원하는 것은 무엇입니까?" 우리의 생각이 전쟁을 넘어서 확장되기 시작합니다. 결국 우리는 단순히 이 전쟁에서의 승리가 아니라 다시는 이 나라에 저들이 처들어 오지 못하게 하는 것이 진정으로 내가 원하는 것이라는 것을 깨닫습니다. 그리고 하나님도 당연히 그것을 원하시리라는 것을 알겠지요. 하나님은 분명히 이 전쟁에서 승리를 우리에게 안겨 줄 것입니다. 우리는 전쟁에 나갔고, 승리했습니다. 그리고 다시 전쟁이 일어납니다. 한번 이긴 것으로 다시는 처들어 오지 못하게 하리라는 것을 이미 예상하고 있었을 수도 있습니다. 이번에도 하나님께 기도합니다. 그러자 다시 우리의 생각이 넓어집니다. 이들이 그저 기세에 눌려 진다면, 이들은 다시 처들어 올 것이다. 우리가 저들보다 뛰어나다는 것을 실증해야만 한다. 그것은 정면대결이 아니라 머리싸움에서 이기는 것이다. 우리가 자신들보다 지혜롭다는 것을 알면 다시는 처들어 오지 못할 것이다. 그러자 계략이 떠오릅니다. 매복지역을 찾아 매복하여 기습하자. 저들이 예상하지 못한 허를 찌르면 저들이 다시는 처들어 오지 않을 것이다. 우리는 이 지혜가 하나님으로 부터 왔음을 알고 있습니다. 우리는 그렇게 매복하여 기습하였고, 승리하였습니다.

역대상 14장 16, 17절
이에 다윗이 하나님의 명령대로 행하여 블레셋 사람들의 군대를 쳐서 기브온에서부터 게셀까지 이르렀더니
다윗의 명성이 온 세상에 퍼졌고 여호와께서 모든 이방 민족으로 그를 두려워하게 하셨더라

결과는 결정되어 있지 않습니다. 다만 우리는 날마다 하나님과 동행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자상한 아버지 처럼 우리의 원하는 것에 귀기울이시고, 우리의 생각을 넓히셔서 우리를 설득하시기도 하시며, 우리에게 믿음과 소망을 더하심으로 담대하게 하시기도 하십니다. 바울 이후 기독교 역사상 최고의 천재를 꼽으라면 초대 교부였던 성 어거스틴을 꼽는데 큰 이견은 없으리라 생각합니다. 그가 한 말을 마지막으로 대답을 마무리 하고자 합니다.
"하나님을 사랑하고, 당신이 원하는 것을 하십시오." -성 어거스틴-

어려우면서도 흥미로운 주제입니다! 글쓰는 내내 저도 즐거웠습니다^-^]]></description>
			<author><![CDATA[숲지기]]></author>
			<pubDate>Mon, 03 Mar 2025 09:09:58 +0000</pubDate>
			<category domain="https://saengcrim.com/?kboard_redirect=1"><![CDATA[익명 Q&A]]></category>
		</item>
				<item>
			<title><![CDATA[1:1 문의]]></title>
			<link><![CDATA[https://saengcrim.com/?kboard_content_redirect=328]]></link>
			<description><![CDATA[숲지기님 사무엘상하에서 보면 다윗이 하나님께 많은 질문들을 하는걸 보게됩니다.

블레셋 사람들과싸울까요? 그들을 내손에 넘겨주시겠습니까? 이런식으로 물어보고 하나님이 넘겨주신다고 했을때 나가서 싸워 이기는 모습, 심지어 어떻게 공격하면 좋은지도 물어보고 하나님은 방법도 알려주십니다.

다윗은 싸우러나갈때 항상 결과를 알고 나간거같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저도 어떤 문제에서 결과에대해 하나님한테 물어보는 태도를 가져야하는지 아니면 결과를 생각하지말고 과정에서 하나님께 물어봐야하는지 고민을하게됩니다.

계획하는 문제에있어서 결론을 하나님앞에 딱 두고 가는게 맞는건가요?

하다보니깐 하나님이 열어주신거같아 가 맞는건가요??]]></description>
			<author><![CDATA[박질문]]></author>
			<pubDate>Sun, 02 Mar 2025 09:06:39 +0000</pubDate>
			<category domain="https://saengcrim.com/?kboard_redirect=1"><![CDATA[익명 Q&A]]></category>
		</item>
				<item>
			<title><![CDATA[Re:1:1 문의]]></title>
			<link><![CDATA[https://saengcrim.com/?kboard_content_redirect=327]]></link>
			<description><![CDATA['후회'라는 것은 지나간 것을 뉘우치는 것을 말합니다. 지나간 것을 뉘우친다는 것은 과거와 지금의 생각이나 상황이 달라졌을 때 가능합니다. 과거와 지금의 상황과 생각이 동일하면서 후회한다는 것은 말의 모순입니다. 따라서 '후회한다'는 말은 과거와 지금의 '내 생각'이 달라졌거나 혹은 '상황'이 달라졌을 때 할 수 있는 말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변하지 않으시는 분 입니다. 하나님의 성품은 결코 변하지 않으며, 그분의 생각도 변하지 않으십니다. 따라서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생각이나 행동을 뉘우쳐 후회하지 않으시는 분 입니다.

그러나 다음 상황에서 문제가 생깁니다. 불변하는 하나님의 생각과 변화하는 인간세상이 상황으로 만났을 때 문제가 발생합니다. 하나님 스스로 계실 때에는 하나님은 후회하실 수 없는 분입니다. 하나님의 생각과 행동은 완전하기 때문에 그로 부터 파생되는 모든 결정들 또한 완전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변화하는 인간들을 상황으로 받아들이게 되는 순간 후회가 가능하게 되어버립니다. 하나님께서 사울을 왕으로 세우실 때의 생각과 결정은 온전하고 완전할 터였습니다. 따라서 사울이 변해버리는 상황만 발생하지 않는다면 그 결정은 영원불변의 후회없는 완전한 결정이 됩니다. 그러나 사울은 변해버렸습니다. 하나님의 완전한 결정이 내려지던 때와 상황이 변해버린 것 입니다. 따라서 이제 '후회'는 필연적으로 발생하게 됩니다. 하나님의 고정불변한 생각은 아마도 이랬을 것입니다. '리더십있고, 하나님을 경외하며, 백성을 능히 통치할만한 인재를 왕으로 세우는 것.' 그리고 이 생각에 당시 사울은 가장 적절한 사람이었고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사울을 왕으로 세우셨을 것 입니다. 이것은 당연히 매우 합리적이고 타당하고 완전한 생각이었을 것으로 여겨집니다. 그리고 이러한 생각은 시간이 지나도 변할수 없는 완전한 생각이겠지요. 그러나 시간이 지나고 상황이 변하게 되었습니다. 사울은 더이상 리더십이 있지도, 하나님을 경외하지도 않는 사람으로 변해버리고 말았습니다. 따라서 하나님의 변하지 않는 생각에 부합하지 않게 되었고, 이에따라 하나님은 필연적으로 '후회'하실 수 밖에 없게 된 것입니다.

하나님 스스로 계시고 스스로에 대해 결정하시는 경우 하나님께 후회란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그것은 불가능합니다. 그러나 매우 변하기 쉬운 인간세상에 대하여 결정하시는 경우 하나님의 결정은 필연적으로 후회하실 수 밖에 없습니다. 바로 이러한 이유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구원'의 문제에 있어서 '인간'의 상황을 일체 고려하지 않는 방법을 생각해 내신 것 입니다. 인간의 구원은 전적으로 하나님에 의해 하나님의 상황으로 해결됩니다. 죄값을 치루는 것도 하나님(예수님)이시고, 죄 사함을 결정하는 것도 하나님이십니다. 그리고 이 구원의 과정을 통하여 인간의 변하는 상황은 더이상 하나님의 결정에 영향을 주는 상황이 아닌게 됩니다.

하나님의 성품은 결코 변하지 않습니다. 인간이 만약 하나님의 결정과 상황의 상호작용으로 하나님과 관계했다면 우리도 사울처럼 하나님에게 필연적으로 후회를 안겨드리는 존재가 될 것 입니다. 그러나 이제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더이상 우리의 상황(행위 등등)이 하나님의 결정(나를 구원하심)에 영항을 주지 못하게 되었습니다. 우리는 그저 하나님의 그 영원히 변하지 않으시고 후회하지 않으시는 성품을 날마다 누리고 기대하기만 하면 됩니다.]]></description>
			<author><![CDATA[숲지기]]></author>
			<pubDate>Wed, 12 Feb 2025 09:05:35 +0000</pubDate>
			<category domain="https://saengcrim.com/?kboard_redirect=1"><![CDATA[익명 Q&A]]></category>
		</ite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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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CDATA[1:1 문의]]></title>
			<link><![CDATA[https://saengcrim.com/?kboard_content_redirect=326]]></link>
			<description><![CDATA[숲지기님 하나님은 후회가 없으신분이라고 성경에서 본거같은데 순종하지 않는 사울왕을 세우신걸 후회하신다는 부분을 봤어요~ 하나님의 성품을 어떻게 이해하고 저의 삶에 적용해야할까요?]]></description>
			<author><![CDATA[박질문]]></author>
			<pubDate>Tue, 11 Feb 2025 09:05:07 +0000</pubDate>
			<category domain="https://saengcrim.com/?kboard_redirect=1"><![CDATA[익명 Q&A]]></category>
		</item>
				<item>
			<title><![CDATA[고대부터 현대까지 서양철학에서 정의론(A Theory of Justice)에 관한 입장 정리]]></title>
			<link><![CDATA[https://saengcrim.com/?kboard_content_redirect=299]]></link>
			<description><![CDATA[<p style="text-align:center;line-height:2;"><span style="font-size:24px;"><b>고대부터 현대까지 서양철학에서 정의론(A Theory of Justice)에 관한 입장 정리</b></span></p><p style="text-align:center;line-height:2;"></p><h1 style="line-height:2;">1. 서양철학에서 정의론에 관한 입장들</h1><p style="line-height:2;">서양철학에서 정의론의 핵심적인 논쟁들을 다음과 같이 아주 간단하게 정리해 보았다.</p><p style="line-height:2;"></p><p style="line-height:2;">1) 아리스토텔레스(목적론적 정의론) : 모든 피조물은 존재의 '목적'을 가지고 있다. 인간은 '좋음(행복)'을 추구하는 본성을 가지고 있다. 따라서 인간이 존재하는 목적은 '좋음'을 느끼기 위해서 이다. 인간이 '좋음'을 느끼게 해 줄수 있는 것이 바로 '정의'이다. 이 정의는 국가적 차원에서 이루어져야 한다.</p><p style="line-height:2;"></p><p style="line-height:2;">2) 토마스 홉스(사회계약설, 의무론) : 우리가 지금 가지고 있는 '판단기준(A)'은 선험적으로 주어져 있는 것이 아니다. 인간은 자연 상태라면 늑대 처럼 그저 자신의 쾌락만을 추구할 것 이다. 인간들은 함께 모여서 '사회'를 이룸으로써 경험(교육 등)을 통해 '판단기준(A)'를 형성하는 것이다. 따라서 우리는 우리가 속한 '사회(국가)'가 말하는 '정의'에 암묵적으로 동의(계약)한 것으로써 그 명령을 따라야 할 의무가 있는 것이다.</p><p style="line-height:2;"></p><p style="line-height:2;">3) 제레미 벤담(공리주의, 의무론) : 인간 사회에서는 항상 선(좋음)과 악(나쁨)이 공존한다. 따라서 최대한 많은 인간들이 '선(좋음)'을 느끼게 하는 것이 바로 '정의'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어쩔 수 없이 인간의 자유를 제한해야 할 때도 있다(정의를 위한 개인의 의무)(소수의 인간이 '나쁨'을 느끼면, 아주 많은 인간이 '좋음'을 느낄 수 있는 경우). 즉, 정의는 사회 전체의 '좋음'의 총량이 증가하는 방향으로 지워져야 한다. </p><p style="line-height:2;"></p><p style="line-height:2;">4) 임마누엘 칸트(목적론적 의무론) : 모든 인간에게는 '판단기준(A)'이 선험적으로 주어져 있다. 그로부터 '좋음'을 추구하는 것이 바로 내면의 '정언명령'이다. 따라서 인간은 '정언명령'을 따라야 한다. 그러나 국가는 그 존재 자체가 이미 '수단'이기 때문에 '정언명령'에 의해 그 정의가 실현될 수 없고, 국가적 정의는 악을 일으킬 '의도들'을 최소화 하는 방향으로 지워져야 한다.</p><p style="line-height:2;"></p><p style="line-height:2;">5) 애덤 스미스(도덕감정론) : 우리가 판단을 내리고 있는 '인식 된 행동(B)'는 서로 다른 상황에서는 상이하게 판단될 수 있다. 따라서 올바르게 윤리적 판단을 내리기 위해서는 '인식 된 행동(B)'을 객관적으로 파악하고자 해야 한다.</p><p style="line-height:2;"></p><p style="line-height:2;">6) 헤겔(국가주의) : 개인의 판단(도덕성)은 주관적이고 추상적이다. 그러나 복수의 인간이 모여 저마다의 '판단기준(A)'을 가지고 합의를 통해 '법'을 만들어 내면, 그 법은 그 공동체의 보편적인 기준(인륜성)인 샘이다. 따라서 그렇게 형성된 국가의 '법'을 개별적인 인간은 따를 수 밖에 없다.</p><p style="line-height:2;"></p><p style="line-height:2;">7) 로버트 노직(자유주의) : 인간은 스스로 '좋음'을 추구할 만한 자유의지를 가지고 있다. 또한, 처한 상황에 따라 판단이 상이해 질 수 있기 때문에 모든 상황에 적용될 수 있는 '규범'을 만드는 것은 불가능하다. 따라서 국가는 그저 인간의 자유를 최대한 보장해주고, 오직 부당하게 '좋음'을 추구하려는 사람들을 제재하는 선에서 그 역할이 그쳐야 한다.</p><p style="line-height:2;"></p><p style="line-height:2;">8) 존 롤스(자유주의 + 공리주의의 의무론) : 인간이 어떤 행동을 판단할 때는 항상 자신이 처한 사회적 상황 가운데서 판단을 내리는 것이다. 즉, '판단기준(A)'는 자신이 속한 사회적 상황에 따라 형성되는 것이다(홉스). 따라서 자신이 속한 사회적 상황을 제거하지 않는 이상, '판단기준(A)'을 반성하는 것은 어렵다.</p><p style="line-height:2;">이제 '무지의 베일(일종의 에포케)'이라는 사고실험을 통해 각자가 처한 각기 다른 상황들을 모두 제거한 뒤에 판단한다면 '자유로운 행동인가?'라는 기준으로만 판단하게 될 것이다. 따라서 개개인의 평등한 자유(균등한 기회 보장, 자유주의)를 최대한 보장해주는 것이 정의의 제1원리가 되어야한다. 그러나 실제 상황은 항상 다르기 때문에 평등한 자유를 보장하기 위해서는 기회가 적은 이들에게 분배(공리주의)를 통해 기회를 제공해 주어야 한다. 이 것이 정의의 제2원리 이다.</p><p style="line-height:2;">'무지의 베일'을 쓴 사람이라면 누구나 이에 동의할 수 밖에 없다. 따라서 이 원리를 따를 의무를 갖어야 한다.</p><p style="line-height:2;"></p><p style="line-height:2;">9) 마이클 센댈(롤스 + 공동체주의) : 롤스는 '판단기준(A)'가 자신이 속한 사회적 상황에 따라 형성된다고 하면서 반성이 어렵다고 말했는데, 무지의 베일을 쓰고 판단을 내렸을 때 순수하게 도출된다고 말하는 정의의 원리들은 사회적 상황에 따라 형성된 '판단기준(A)'에 의해 도출된 것이 아닌가? 스스로 모순을 범하고 있다.</p><p style="line-height:2;">'판단기준(A)'은 사회적 상황(공동체)에 의해 형성된 것은 맞다. 그러나 롤스 처럼 무지의 베일을 통해 그것을 제거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은 모순이다. 오히려 공동체에 의해 형성된 '판단기준(A)'을 신뢰하고 공동체의 정의에 적용해야 한다. 자신이 필연적으로 공동체에 속하여 판단하는 존재라는 사실을 인식하고, 복수의 판단주체가 합의하고 있는 '규범(의무)'을 지켜야 한다.</p><p style="line-height:2;"></p><p style="line-height:2;">10) 위르겐 하버마스(민주주의) : 인간에게 있는 '판단기준(A)'은 절대적 확실성의 기준일 수 밖에 없다. 따라서 국가적 정의는 그러한 판단기준을 가진 복수의 인간들이 모여 다수결에 의해 결정 할 때 세워질 수 있다.</p><p style="line-height:2;"></p><p style="line-height:2;">11) 폴 리쾨르(종합, 화해의 철학) : 리쾨르는 롤스에 대한 센댈의 비판을 수용하면서, '판단기준(A)'이 선험적이면서도 공동체에 의해 영향을 받는다는 점을 통찰한다. 인간의 도덕 판단은 칸트가 말한 것 처럼 정언되고 있으면서도, 구체적인 상황에서 공동체에 의해 영향을 받아 형성된 기준이 이데올로기적 기능을 하기도 한다는 것이다. 따라서 국가적 정의의 기준을 수립함에 있어서 선험적인 기준과 공동체의 전통을 대립으로 두고 변증법적 과정을 통하여 이뤄져야 한다는 것이다.</p><p style="line-height:2;"></p><p style="line-height:2;"></p><h1 style="line-height:2;"><span style="font-family:'Noto Sans KR';">2. 정의론을 논의하는데 있어 존재론의 근본성</span></h1><p style="line-height:2;"><span style="font-family:'Noto Sans KR';">정의론에 이러한 흐름들은 크게 ‘자연법’, 즉 인간 본성에 선험적으로 내재해 있는 윤리적 판단기준이 정초되어 있는지, 아니면 정초되어 있지 않은지에 대한 입장으로 양분될 수 있다.</span></p><p style="line-height:2;text-align:center;"><img src="https://saengcrim.com/wp-content/uploads/kboard_attached/6/202604/69cda3fd164c61644741.png" alt="" style="text-align:center;" /></p><p style="line-height:2;">리쾨르의 정의론은 자연법의 존재 유무를 논하는 논의가 그 핵심에 있다고 보여진다. 리쾨르는 ｢정의론｣이나 ｢타자로서의 자기자신｣의 3부에서 사회적 정의와 이데올로기 비판 방법에 관해 길고 자세하게 서술하고 있다. 그는 분명 정치철학과 일상 생활의 도덕들에 대해 이야기 하고자 한다. 그러나 그는 먼저 자연법을 옹호하는 것으로부터 시작한다. 그러나 리쾨르의 이러한 전개는 정의나 법철학 또는 교육철학을 이야기 할 때 쉽게 간과할 수 있는 첫단추를 올바로 꾀어주는 매우 중요한 수순이라고 생각된다.</p><p style="line-height:2;">소위 정치철학은 역사상 서양 보다는 동양에서 그 논의가 보다 핵심에 위치해 있었다. 서양은 플라톤으로부터 이어져 오는 존재론과 인식론에서 그 논쟁이 오랫동안 핵심을 차지해 왔다. 그러나 동양철학에서 주로 ‘유학’이라고 불리는 ‘공맹사상’은 그 핵심이 주로 정치철학이었다. 그런데 유학의 궁극적 목적이 정치철학이었음에도 정작 유학의 글들은 거의 대부분이 ‘인성론(인간 본성론)’에 관한 지리한 논쟁들로 이루어져 있다는 사실이다. 유학에서 인간 본성론은 ‘제자백가’로 불리는 사상들로 집결될 수 있는데, 그것은 다음과 같이 간단히 정리 될 수 있다.</p><p style="line-height:2;"></p><blockquote style="line-height:2;">1) 성선설 : 인간의 본성 가운데는 ‘선’을 아는 것이 포함되어 있다. 이는 서양에서 도덕적 정초주의의 입장으로 볼 수 있는데, 즉 ‘자연법’을 옹호하는 입장이다. 헤라클레이토스로부터 이어지는 그리스의 자연법 전통을 따르는 쪽이 이에 대응한다고 할 수 있다.<br />2) 성악설 : 인간의 본성 가운데 ‘선’은 없고, 자연적 본능(악)만이 있다. 서양에서는 홉스가 “인간은 자연상태에서 만인에 대한 만인의 투쟁상태다.”라고 말한 것과 대응되는 입장이다. 인간은 본디 짐승과 다를바 없다는 입장으로, 자연법을 부정하는 입장이다.<br />3) 성무선악설 : 인간의 본성은 특징지어져 있지 않다. 이 입장은 서양에서 로크의 백지론과 대응되는 입장이다. 본디 자연 상태의 인간이라고 해도 처음부터 약육강식의 악한 습성을 가지고 있는 것은 아니라는 것이다. 본성으로 보이는 모든 것은 경험에 의한 후험적 생성물일 뿐이다.<br />4) 유성선 유성불선 : 선한 본성을 가지고 태어나는 이도 있고, 악한 본성을 가지고 태어나는 이도 있다. 이 입장은 세계대전 시기에 잠깐 출몰했던 ‘우생학’과 대응한다고 볼 수 있다.</blockquote><p style="line-height:2;"></p><p style="line-height:2;">이 외에도 동양에서는 조선 후기에 이르기 까지 많은 사상가들이 인간의 본성을 두고 논쟁해왔다. 정치철학을 핵심으로 하는 유학에서 왜 이토록 인간의 본성에 집착했는가? 왜냐하면 인간의 본성을 무엇으로 보고 출발할 것이냐에 따라 정치적 정의 실현의 판도가 상이하게 바뀌기 때문이다. 예로 만약 성선설을 따른다면, 인간은 본디 선해 질 수 있는 가능성이 있으나 환경에 따라 악을 행하게 되는 것이므로 인간이 악을 행할 환경에 처하지 않도록 보호해주는 한편 자유를 보장해주는 방향으로 가야 할 것이다. 그러나 성악설을 따른다면, 인간의 본성을 제한하는 한편 사회적 합의의 선을 교육하고, 사회적 의무를 강조하는 방향으로 가야 할 것이다.</p><p style="line-height:2;">결과적으로 어떤 것이 정치적으로 더 올바른 방향을 지워주는지를 판단하려고 하는 것은 사고의 오류를 가져다 줄 위험이 매우 크다. 왜냐하면 그 사례들 또한 저마다의 역사 해석에 따라 상이하게 되기 때문이다. 따라서 정치적 정의론에까지 연역해 나갈 수 있는 근본적인 ‘사실’이 무엇인지를 먼저 확고하게 하는 것(우회로를 거치는 것)이 오히려 목적지에 더 빨리 도착하는 길이다. 그런 의미에서 리쾨르는 자신의 윤리학과 정의론을 수립하는데 있어서 먼저 인간의 ‘존재론’을 수립함으로 그 논의를 시작하고 있는 것이다.</p><p style="line-height:2;"></p><p style="line-height:2;"></p><h1 style="line-height:2;">3. 정의론을 논의하는데 있어 신학의 근본성</h1><p style="line-height:2;"><span style="font-family:'Noto Sans KR';">이처럼 리쾨르가 시사하고 있는 중요한 점은 인간에게 있는 ‘자연법’의 유무이다. 이는 ‘신학’과 직결된다. 인간의 윤리와 정치적 정의를 다루는 것은 단순히 철학적으로만 다루어질 수 없는 인간 본성의 ‘대전제’에 대한 모종의 입장을 필요로 한고 있다는 것이다. 20세기 기독교 변증가였던 ‘C.S. 루이스’는 ｢순전한 기독교｣ 제3부에서 사회적 정의를 논의하는데 있어 고려해야 할 세가지 요소를 말한다. 그것은 첫째, 개인과 개인이 상호 피해를 주지 않아야 한다(자유보장). 둘째, 개인과 개인이 상호 피해를 주지 않기 위해 각 개인이 올바로 서 </span><span style="font-family:'Noto Sans KR';">﻿</span><span style="font-family:'Noto Sans KR';">있어야 한다(복지). 루이스는 두 번째 사항까지 말한 뒤 일반적으로 많은 사람들이 이 두가지 고려사항만을 가지고 정의를 논한다는 점을 꼬집는다. 그러면서 루이스는 다음의 세 번째 고려사항이 가장 중요하다고 주장한다. 셋째, 이 사회가 도달하고자 하는 최종 ‘목적지’는 어디인가? 루이스는 만약 인간이 영원히 살 존재라고 가정하는 것과, 다지 이 땅에서의 삶이 끝인 물질적인 존재라고 가정하는 것은 정의에 대한 전혀 다른 입장을 내어놓을 수 밖에 없다고 말한다. 그러면서 그는 만약 선단의 목적지가 호주인데 인도에 도착해 버린다면, 아무리 배가 서로 부딪히지 않으며, 각각의 배가 올바로 움직였다고 해도 그 선단이 올바로 항해했다고 볼 사람은 없다고 예를 든다.</span></p><p style="line-height:2;"><span style="font-family:'Noto Sans KR';">현대 정의론을 논의하는데 있어 신학적 입장을 배제하는 것은 결코 타당한 태도가 아니다. 리쾨르가 롤스를 비판하면서 던졌던 ‘누가?’라는 질문은 인간의 본성을 묻고 있는 동시에 ‘신학’을 요구하는 것과 다름없다. 그렇다면 정의론을 논의하는데 있어서 정치철학자들이나 법철학자들은 마땅히 신학에 먼저 귀를 기울여야 한다. 사실 엄밀한 의미에서 위에서 언급한 저들은 이미 저마다의 신학적 입장에 서서 논의를 전개하고 있는 것이다. 따라서 리쾨르가 정의론에서 존재론적 질문을 던졌던 것처럼, 우리는 정의론과 존재론에 있어서 다음과 같은 신학적 질문을 던져야 할 것이다. “정의론은 왜 필요한가? 우리는 왜 존재하는가? 인류는 어디로 가야 하는가?” 이 질문은 오직 종교에서만 대답할 수 있는 질문이다. 우리는 어떤 대답을 해 주어야 하는가?</span></p><p style="line-height:2;text-align:center;"><img src="https://saengcrim.com/wp-content/uploads/kboard_attached/6/202604/69cda3fd164c61644741.png" alt="" /></p><div style="width:90%;margin:20px 0;"><table style="width:100%;min-width:700px;border-collapse:collapse;font-family:inherit;font-size:15px;color:#333;table-layout:fixed;">  <thead>   <tr style="width:40%;background-color:#2c3e50;color:#ffffff;padding:15px;text-align:center;font-size:1.1em;font-weight:600;border:1px solid #1a252f;">    <th style="width:40%;">A(도덕 판단기준)에 대한 ‘비정초주의’</th>    <th style="width:20%;">양 진영 간의논쟁 방향</th>    <th style="width:40%;">A(도덕 판단기준)에 대한 ‘정초주의’</th>   </tr>  </thead>  <tbody>   <tr>    <td style="padding:20px;border:1px solid #e0e0e0;line-height:1.6;background-color:#f8f9fa;text-align:right;vertical-align:top;">     B를 판단하는 것은 사람마다 다 다르지! 따라서 ‘A’는 주관적으로 만들어지는 것!     <span style="margin-top:12px;font-weight:bold;color:#2c3e50;">- 소피스트 -</span>    </td>    <td style="padding:20px;border:1px solid #e0e0e0;line-height:1.6;background-color:#eef2f5;">     <span style="font-size:1.5em;color:#2980b9;font-weight:bold;text-align:left;">→</span>     <div style="background:#ffffff;padding:8px;border:1px dashed #95a5a6;font-size:0.85em;font-weight:bold;color:#d35400;max-width:80%;text-align:left;">“A가 될 수 있는 보편적인 기준을 제시할 수 있어?”</div><div style="text-align:right;"><span style="color:rgb(41,128,185);font-size:1.5em;font-weight:bold;font-family:inherit;">←</span></div>          <div style="background:#ffffff;padding:8px;border:1px dashed #95a5a6;font-size:0.85em;font-weight:bold;color:#d35400;max-width:80%;float:right;">“만약 A가 주관적인 것이라면 국가의 법을 지켜야 할 이유가 있니?”</div><p></p>    </td>    <td style="padding:20px;border:1px solid #e0e0e0;line-height:1.6;background-color:#fdfbf7;text-align:left;vertical-align:bottom;">     인간은 모두 행복을 추구하지! 따라서 A는 ‘B를 통해 행복해질 수 있는가?’라는 보편적 기준이지! 사람마다 B에 관한 판단이 달라진다고 해도, 행복을 목적으로 한다는 기준으로 판단하는 A는 보편적이지!     <span style="margin-top:12px;font-weight:bold;color:#2c3e50;">- 아리스토텔레스 -</span>    </td>   </tr>   <tr>    <td style="padding:20px;border:1px solid #e0e0e0;line-height:1.6;background-color:#f8f9fa;text-align:right;vertical-align:top;">     ‘A’는 개인의 경험을 통해 만들어지지! 그런데 만약 국가의 법을 지키지 않으면 주관적인 A를 가진 인간들은 서로 대립할 수밖에 없어!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사회적 합의(계약)를 통해 법을 지킬 의무를 이야기할 수 있어.     <span style="margin-top:12px;font-weight:bold;color:#2c3e50;">- 홉스 -</span>    </td>    <td style="padding:20px;border:1px solid #e0e0e0;line-height:1.6;background-color:#eef2f5;">     <span style="font-size:1.5em;color:#2980b9;font-weight:bold;text-align:left;">→</span><div style="text-align:right;"><span style="color:rgb(41,128,185);font-size:1.5em;font-weight:bold;font-family:inherit;">←</span></div>     <div style="background:#ffffff;padding:8px;border:1px dashed #95a5a6;font-size:0.85em;font-weight:bold;color:#d35400;max-width:80%;float:right;text-align:right;">“그럼 국가의 법이 국민을 탄압할 때도 국가의 법을 지켜야겠네? 국가의 법이 ‘A’와 충돌하는 경우에도 국가의 법을 따라야 한다고?”</div>    </td>    <td style="padding:20px;border:1px solid #e0e0e0;line-height:1.6;background-color:#fdfbf7;text-align:left;vertical-align:bottom;">     ‘A’는 내면의 성찰을 통해 선험적으로 주어져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어!     <span style="margin-top:12px;font-weight:bold;color:#2c3e50;">- 데카르트 -</span>    </td>   </tr>   <tr>    <td style="padding:20px;border:1px solid #e0e0e0;line-height:1.6;background-color:#f8f9fa;text-align:right;vertical-align:top;">     인간은 행복을 추구한다며? 그렇다면 최대 다수의 행복을 추구해야 한다는 기준 아래에서 국가의 법이 세워진다면, 주관적인 ‘A’와 국가의 법이 충돌해도 따를 수 있겠지?     <span style="margin-top:12px;font-weight:bold;color:#2c3e50;">- 공리주의 -</span>    </td>    <td style="padding:20px;border:1px solid #e0e0e0;line-height:1.6;background-color:#eef2f5;">     <span style="font-size:1.5em;color:#2980b9;font-weight:bold;text-align:left;">→</span><div style="text-align:right;"><span style="color:rgb(41,128,185);font-size:1.5em;font-weight:bold;font-family:inherit;">←</span></div>    </td>    <td style="padding:20px;border:1px solid #e0e0e0;line-height:1.6;background-color:#fdfbf7;text-align:left;vertical-align:middle;">     ‘A’가 경험을 통해 형성된다면, 왜 예외 없이 인간은 누구나 ‘행복’을 선으로 느끼는가? ‘A’는 인간 보편에 선험적으로 주어져 있는 기준으로써, B를 ‘목적’이냐 ‘수단’이냐에 따라 판단하는 것이다.     <span style="margin-top:12px;font-weight:bold;color:#2c3e50;">- 칸트 -</span>    </td>   </tr>   <tr>    <td style="padding:20px;border:1px solid #e0e0e0;line-height:1.6;background-color:#f8f9fa;text-align:right;vertical-align:top;">     인간이 보편적인 A를 가지고 있다면, 왜 B에 관한 판단이 사람마다 차이가 나는가? 애초에 A는 없다. 인간이 행복을 선으로 느끼는 이유는 특정 경험에 의한 감정의 기억일 뿐이다. 인간은 보편적인 경험의 지평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비슷한 도덕관을 갖고 있는 것처럼 보이는 것 뿐이다. 따라서 인간이 B를 판단하는 것은 ‘공감’에 의해 그렇게 하는 것 뿐이다.     <span style="margin-top:12px;font-weight:bold;color:#2c3e50;">- 애덤 스미스 -</span>    </td>    <td style="padding:20px;border:1px solid #e0e0e0;line-height:1.6;background-color:#eef2f5;">     <span style="font-size:1.5em;color:#2980b9;font-weight:bold;text-align:left;">→</span>     <div style="background:#ffffff;padding:8px;border:1px dashed #95a5a6;font-size:0.85em;font-weight:bold;color:#d35400;max-width:80%;">“인간이 보편적인 A를 가지고 있다면, 왜 B에 관한 판단이 사람마다 차이가 나는가?”</div><div style="text-align:right;"><span style="color:rgb(41,128,185);font-size:1.5em;font-weight:bold;font-family:inherit;">←</span></div>    </td>    <td style="padding:20px;border:1px solid #e0e0e0;line-height:1.6;background-color:#fdfbf7;text-align:left;vertical-align:bottom;">     B에 관한 판단은 사람마다 차이가 나지, 그러나 그 사람들이 모두 모여서 ‘법’을 만들면, 그 법은 A를 통해 형성된 것이기 때문에 모두가 ‘법’을 지켜야 한다는 데에 동의하는 것이다! 따라서 A는 있다.     <span style="margin-top:12px;font-weight:bold;color:#2c3e50;">- 헤겔 -</span>    </td>   </tr>   <tr>    <td style="padding:20px;border:1px solid #e0e0e0;line-height:1.6;background-color:#f8f9fa;text-align:right;vertical-align:top;">     B에 관한 판단이 사람마다 다른 이유는 저마다의 각기 다른 상황 속에서 A를 형성하고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상황을 모두 제거하면, ‘자유’라는 가치가 남는다. 그런데 공동체 안에서 최대 다수의 자유를 보장하기 위해서는 법으로 소수의 자유를 제한해야만 한다.     <span style="margin-top:12px;font-weight:bold;color:#2c3e50;">- 롤스 -</span>    </td>    <td style="padding:20px;border:1px solid #e0e0e0;line-height:1.6;background-color:#eef2f5;">     <span style="font-size:1.5em;color:#2980b9;font-weight:bold;text-align:left;">→</span><div style="text-align:right;"><span style="color:rgb(41,128,185);font-size:1.5em;font-weight:bold;font-family:inherit;">←</span></div>    </td>    <td style="padding:20px;border:1px solid #e0e0e0;line-height:1.6;background-color:#fdfbf7;text-align:left;vertical-align:bottom;">     인간은 자유롭게 원하는 바를 행동할 때, ‘행복’을 느낀다. 따라서 A는 B를 ‘자유로운 행동인가?(수단으로가 아니라 목적으로냐?)’라는 기준으로 판단하는 것이다. 따라서 국가의 ‘법’은 인간의 자유를 최대한 보장해주는 방향이어야 한다.     <span style="margin-top:12px;font-weight:bold;color:#2c3e50;">- 노직 -</span>    </td>   </tr>   <tr>    <td style="padding:20px;border:1px solid #e0e0e0;line-height:1.6;background-color:#f8f9fa;text-align:right;vertical-align:top;">     상황에 따라 저마다 다르게 형성된 A를 두고 공동체적 합의에 이르기 위해서는 오히려 A를 신뢰하는 입장에서 이루어지는 것이다. ‘법’은 공동체의 전통에 기준하여 점검될 수 있다. 따라서 공동체의 합의에 따라야 할 의무가 있다.     <span style="margin-top:12px;font-weight:bold;color:#2c3e50;">- 마이클 센델 -</span>    </td>    <td style="padding:20px;border:1px solid #e0e0e0;line-height:1.6;background-color:#eef2f5;">     <span style="font-size:1.5em;color:#2980b9;font-weight:bold;text-align:left;">→</span><div style="text-align:right;"><span style="color:rgb(41,128,185);font-size:1.5em;font-weight:bold;font-family:inherit;">←</span></div>    </td>    <td style="padding:20px;border:1px solid #e0e0e0;line-height:1.6;background-color:#fdfbf7;text-align:left;vertical-align:bottom;">     ‘법’은 항상 점검되어야 한다. 그런데 A가 사회적 경험으로 생겨났다면, ‘법’은 대체 어떤 기준으로 점검할 수 있는가? 점검은 A에 의해 가능하다. 따라서 A를 가진 복수의 인간들이 다수결에 의해 ‘법’을 점검해야 한다.     <span style="margin-top:12px;font-weight:bold;color:#2c3e50;">- 하버마스 -</span>    </td>   </tr>   <tr>    <td style="padding:20px;border:1px solid #e0e0e0;line-height:1.6;background-color:#f8f9fa;"></td>    <td style="padding:20px;border:1px solid #e0e0e0;line-height:1.6;background-color:#eef2f5;"><div style="text-align:right;"><span style="color:rgb(41,128,185);font-size:1.5em;font-weight:bold;font-family:inherit;">←</span></div>    </td>    <td style="padding:20px;border:1px solid #e0e0e0;line-height:1.6;background-color:#fdfbf7;text-align:left;vertical-align:top;">     A는 있는 것이 분명하지만, 그것을 명확하게 기술하는 반성은 불가능하다. 왜냐하면, A는 오직 어떤 특정 B를 판단한 결과에 따라 나타나는데, B의 상황은 항상 다르기 때문에, 명확한 A가 무엇인지는 알 수 없는 것이다.따라서 우리는 ‘법’을 제정할 때, 어떤 법의 상황을 B에 대입하여, A의 결과를 확인하는 식으로 제정하거나 점검하는 식으로 나아가야 한다.     <span style="margin-top:12px;font-weight:bold;color:#2c3e50;">- 폴 리쾨르 -</span>    </td>   </tr>  </tbody> </table></div>]]></description>
			<author><![CDATA[숲지기]]></author>
			<pubDate>Mon, 10 Feb 2025 08:05:28 +0000</pubDate>
			<category domain="https://saengcrim.com/?kboard_redirect=6"><![CDATA[숲지기 블로그]]></catego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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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CDATA[Re:1:1 문의]]></title>
			<link><![CDATA[https://saengcrim.com/?kboard_content_redirect=325]]></link>
			<description><![CDATA[먼저 직관과 이성이라는 단어의 의미는 학자마다 정의하는 것이 다릅니다. 그러나 질문을 통하여 직관은 '눈에 보이는 것과 경험하 는 것', 이성은 '눈에 보이지 않지만 합리적인 사고'라고 정의해 주셨기 때문에 이 정의에 따라 이야기 해 봅시다.

<strong>1. 인간이 어떤 것을 알 수 있는 방법의 종류</strong>
우리는 사실, 진리, 현상, 세상, 타인, 지식 등등 이러한 것들을 어떤 방법으로 습득하고 배우게 될까요? 여기에는 크게 두가지 방 법이 있습니다.
하나는 경험을 통해 배우는 것입니다. 직접 해보거나, 관찰하거나, 느껴보거나, 시행착오를 격어보거나 하는 방법을 통하여 "아~ 이건 이거구나!"하고 배우거나 지식을 습득하거나 하는 것이지요. 이것을 논리학에서는 '귀납적 방법'이라고 말합니다. 먼저 경험을 통해 '어떤 사건'을 습득하고, 그 습득한 경험을 통하여 '어떤 것(사실, 지식 등등)'을 도출해 내는 방법이지요.
또 다른 하나는 이성을 통해 배우는 것입니다. 원래 있는 정보를 분석하거나, 창의력을 발휘하여 발견하거나, 생각하여 깨닫거나 하는 방법을 통하여 "아~ 이게 그거구나!"하고 깨닫거나 지식을 습득하거나 하는 것이지요. 이 것을 논리학에서는 '연역적 방법'이 라고 말합니다. 이미 있는 어떤 정보들을 통하여 다른 정보를 조합해내거나, 더 세분화 하는 방법이지요.
이렇게 인간은 '귀납'과 '연역'이라는 두가지 방법을 통하여 정보를 습득하고 지식을 얻습니다. 이러한 방법은 공부할 때 뿐만 아니 라 인간이 알 수 있는 모든 영역에 있어서 사용되는 방법입니다. 따라서 신앙생활 또는 하나님을 알아갈 때에도 이러한 방법을 통하 여 알아가게 됩니다. 두 방법 모두 똑같이 중요한 방법이며, 어느 한쪽을 더 중요시하여 다른 한 방법을 무시하거나 해서는 안됩니 다.(만약 그렇게 되면 독단주의가 되고 맙니다.) 두 방법은 모두 장점과 단점(한계)을 가지고 있습니다. 따라서 두 방법은 상호 보 완적인 방법입니다.

<strong>2. 귀납의 한계</strong>
귀납 즉, 경험을 통해 정보를 습득하는 방법을 생각해 봅시다. 예를들어 어느날 누가 백조를 관찰했습니다. 백조는 흰색이었습니다 . 그가 몇날 몇일동안 백조를 관찰했지만, 백조는 모두 흰색이었습니다. 그가 자기 주변 사람들에게 모두 묻고 다녔습니다. 혹시 흰 색이 아닌 백조를 본적이 있냐고, 그러나 그의 주변에 있는 모든 사람들은 흰 백조 밖에는 본적이 없다고 말했습니다. 그래서 그 사 람은 생각했습니다. '아! 백조는 모두 흰색이구나.' 이 사람은 이 정보를 사실로 받아들였습니다. 그러나 오스트레일리아에 사는 백 조는 털이 검은색인 백조가 있습니다. 이 사람이 사실로 받아들인 정보는 어디까지나 이 사람이 경험한 것 안에서만 사실입니다. 이 처럼 경험을 통해 습득할 수 있는 정보는 어디까지나 그 경험세계 안에서만 사실이라는 한계를 지닙니다. 절대적인 진리인지 아닌지 는 불분명 하지요.
만약 어떤 사람이 오직 귀납적 방법(직관적 방법, 경험)을 통해서만 하나님에 대해 알아간다고 해 봅시다. 이 사람은 어떻게든 '하 나님'에 대한 것을 경험하기 위해 애쓸 것 입니다. 그래서 이 사람이 체험하고 경험한 것을 통해 '아! 하나님은 이런 분 이구나!'하 고 생각했다고 합시다. 그 사람의 그 생각은 과연 맞을까요? 맞을 수도 있고 틀릴수도 있습니다. 경험을 통해 습득한 것으로는 '맞 고, 틀리고'를 결코 단언할 수 없습니다. 만약 어떤 사람이 한번 십일조를 빼먹었습니다. 그런데 그 주에 그 사람에게 무언가 안좋 은 일이 일어났습니다. 그리고 그러한 경험이 세번정도 반복해서 일어났습니다. 그렇다면 이 사람은 십중팔구 '십일조를 안하면 벌 을 받는다'는 생각을 가지게 될 것입니다. 그렇다면 그 생각은 '진리'일까요? 그럴 수 없습니다. 그건 어디까지나 그 사람 경험의 한계 안에서만 얻을 수 있는 결론일 뿐입니다. 세상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십일조를 안할 때 마다 매번 무언가 안좋은일을 격는 경험 을 할까요? 그렇게 절대시 할 수 있는 경험은 없습니다. 경험은 대부분 예외를 갖습니다.
3. 연역의 한계
연역 즉, 이성을 통해 정보를 습득하는 방법은 다음과 같은 한계를 갖습니다. 예를들어 어느 나라에는 '백조'라고 하는 새가 살지 도 않고 오지도 않는다고 해 봅시다. 그 나라의 모든 사람들은 책과 TV 어디에서도 백조를 본 적이 없다고 칩시다. 그렇다면 그 나 라 사람들은 '백조'라는 동물에 대해 어떠한 정보를 습득할 수 있나요? 없습니다. 이처럼 이성으로 무언가를 생각해서 알고 싶으면, 일단 1차 정보가 있어야 합니다. 일단 나에게 주어진 어떤 정보들이 있어야 그걸 통해서 생각하고 판단하는 이성적 방법을 사용 할 수 있습니다.
만약 어떤 사람이 오직 연역적 방법(이성적 분석, 판단)을 통해서만 하나님에 대해 알아간다고 해 봅시다. 이 사람의 하나님은 늘 관념속에만 존재하는 하나님일 것 입니다. 이 사람은 '성경'이라는 1차 정보를 통해 얻은 하나님에 대한 정보를 가지고 있을 수 있 지만, '경험'을 통해 확인하기 전에는 이 사람이 결코 그 하나님을 진짜로 믿고 있는지는 불분명합니다. 또한 경험을 통해 연단받지 않는 이 사람의 영적 성숙도는 성장하기 매우 어렵겠지요.

<strong>4. 적용</strong>
신앙생활이나 하나님에 대해 알아갈 때도 이러한 방법들이 상호 보완적으로 사용됩니다.(그래야만 합니다.) 우리는 경험해야 합니 다. 경험만이 우리의 믿음과 생각을 더욱 확고히 해줍니다. 그러나 우리는 생각해야 합니다. 우리의 경험이 진짜 참 경험인지 검증 하고 혹 우리가 잘못 알고 있는 것은 없는지 분별해야 합니다. 이성은 직관을 통해 믿음으로 성장할 수 있으며, 직관은 이성을 통해 서만 진리로 인정받을 수 있습니다.

<strong>5. 좀 더 어려운 내용 : 순수이성</strong>
사실 인간에게는 귀납과 연역의 방법 외에 한가지 방법이 더 있습니다. 이 방법은 귀납과 연역 모두에 영향을 미치는 근원적인 인 간의 사고 방법입니다.
백조가 모두 흰색인지 아니면 검은색 백조가 세계 어딘가에 있는지에 대해서 '이성'으로 알 수 있을까요? 그건 이성으로 알 수 있 는 문제가 아닙니다.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백조를 다 관찰(경험)해 봐야 알 수 있는 문제이지요. 또한 그렇게 경험해 본 뒤에 얻는 지식은 '백조에 대한 새로운 지식(검은백조)'을 얻을 수 있는 가능성을 열어줍니다.
그럼 '차이코프스키'의 '백조의 호수'를 본 사람이 그 작품 속 백조의 상징이 무엇인지 '경험'으로 알 수 있을까요? 그건 경험으로 알 수 있는 문제가 아닙니다. 이성을 통해 분석하고 판단해야 알 수 있는 문제이지요. 그러나 이성을 통해 분석해서 알게 된 것은 원래 차이코프스키가 가지고 있는 지식을 알게 되는 것 뿐입니다.
이처럼 귀납의 방법은 새로운 사실(정보의 확장)을 알 수 있는 가능성이 있으나 모든 걸 다 경험해 봐야 진리를 알 수 있고, 반대 로 연역의 방법은 분석을 통해 금방 진리를 도출할 수 있으나 원래는 없던 새로운 지식(정보의 확장)을 주는 것은 아닙니다.
우리는 지금까지 이 두가지 방법만 생각해 보았습니다. 그런데 한가지 방법이 또 하나 있습니다. 이 방법은 귀납의 방법처럼 새로 운 사실을 알 수 있는 가능성이 있습니다. 그러나 동시에 연역의 방법처럼 모든 것을 다 경험해 보지 않고서도 금방 진리를 도출할 수도 있습니다. 두 방법의 장점만을 모은 방법입니다. 이 방법을 예를 들어 보겠습니다.
"169382 + 395892 = 565274" 이러한 수의 덧샘을 일상생활에서 경험해 보신적이 있습니까? 경험해 보지 않았다면 새로운 정보이겠 군요?(만약 인류 최초로 이 계산을 한 사람의 경우에는 진짜 새로운 정보 일 것입니다.) 경험해 보지 않았지만 우리는 이 덧샘을 계 산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우리가 금방 계산해 낸 이 덧샘은 '진리'입니다. 예외가 없이 확실한 정보이지요.
어떻게 이 것이 가능했습니까? '덧샘공식'을 우리가 단지 배웠기 때문일까요? 그렇다면 우리가 배운 그 덧샘공식은 어떻게 하나의 예외도 없다는 것을 수학선생님은 확신했을까요? 이러한 식의 '진리탐구 방법'을 어려운 말로 '선험적 종합판단'이라고 합니다. 이 방법은 사실 인간이 만들어낸 방법이 아닙니다. 원래 이 우주에 있는 일종의 '법칙'이지요. 인간은 이 것을 '발견'해서 사용하고 있 을 뿐 입니다. 결코 인간이 '발명'해 낸 것이 아니지요. 이러한 방법을 주로 사용하는 예는 다음과 같은 것들이 있습니다. '수학', '논리학', '기하학', '물리과학', 등.
이 방법은 신기하게도 인간이 아닌 자연과 우주를 분석하고 판단할 때 사용해도 항상 '진리'를 도출합니다. 이 방법은 이성과 경험 세계 모두에 초월적으로 적용됩니다. 인간은 이 방법을 사용할 수 있는 일종의 '기능'을 가지고 있습니다. 누가 이 기능을 인간에게 주엇을까요? 그리고 왜 이 방법이 우주에 적용되고 있을까요? 우연이 아니라고 한다면, 이 방법은 이 우주의 '창조자'가 선택한 방 법입니다. 이 우주의 '창조자'는 이 방법을 우주에 적용시켰으며, 인간으로 하여금 이 방법을 사용할 수 있는 기능을 주었습니다. 따라서 그분은 이 기능을 통하여 인간이 모종의 '진리'를 탐구 할 수 있도록 의도하셨다고 보입니다.
우리의 신앙이 '합리적'이고 '논리적'이어야 할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우리는 직관과 이성 모두를 사용하여 하나님을 알아 가며, 신앙생활을 해 나갑니다. 그러나 어떤 방법을 사용하며, 또 상호 보완적으로 사용한다고 하더라도 그 결론이 '논리적'이지 못 하다면, 이는 '진리'와 대응하지 못하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우리가 경험할 수 있는 기적과 구원의 원리 등 신앙에 있어서 신비 적이고 초자연적인 것들도 '신학'이라는 학문 안에서는 모두 논리적으로 설명됩니다. 적어도 제가 아는 한 '기독교' 안에서는 '논리 적이지 않은' 명제는 존재하지 않습니다. 흔히 논리적으로 설명할 수 없다는 관용적인 표현은 그 말을 하는 사람이 아직 그 결론에 대한 논리적 타당성을 이해하지 못했거나 논리적으로 합당한 중간명제를 아직 습득하지 못했을 때 사용합니다. '닭은 개다.'와 같이 아이에 말이 안되는 논리적이지 못한 말의 경우에는 '말이 안된다'는 관용표현을 주로 사용합니다. 이러한 관용표현을 반영해서 다 시 말해 본다면, 예수님의 기적과 우리의 구원사역 일체는 모두 논리적인 설명이 가능합니다. 따라서 '말이 됩니다.'
조금 어려운 내용입니다^^ 차근차근 읽어보시고 이해되지 않는 부분이 있거나 다른 궁금한 점이 있으면 계속해서 질문해 주세요~!]]></description>
			<author><![CDATA[숲지기]]></author>
			<pubDate>Wed, 05 Feb 2025 09:04:40 +0000</pubDate>
			<category domain="https://saengcrim.com/?kboard_redirect=1"><![CDATA[익명 Q&A]]></catego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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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CDATA[1:1 문의]]></title>
			<link><![CDATA[https://saengcrim.com/?kboard_content_redirect=324]]></link>
			<description><![CDATA[숲지기님 안녕하세요~! 직관적인것과 이성적인것은 다르다고 생각하는데 이성이발달하면 직관도 발달할수있는건가요?? 직관적인것은 눈에보이는것과 경험하는것 이라면 이성적인것은 눈에보이지 않지만 합리적이고 객관적으로 사고하는것이라고 했을 때, 신앙생활은 직관과 이성 둘다필요한건가요? 아니면 이성이 더 중요한건가요??]]></description>
			<author><![CDATA[박질문]]></author>
			<pubDate>Tue, 04 Feb 2025 09:03:35 +0000</pubDate>
			<category domain="https://saengcrim.com/?kboard_redirect=1"><![CDATA[익명 Q&A]]></category>
		</ite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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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CDATA[Re:1:1 문의]]></title>
			<link><![CDATA[https://saengcrim.com/?kboard_content_redirect=323]]></link>
			<description><![CDATA[일단 쉽게 대답해보겠습니다. 더 궁금한점은 계속해서 질문해주세요~
성경은 모든 시대 모든 사람에게 주시는 메시지 입니다. 따라서 특정 시대의 특정한 사람 즉, '내가' 성경을 읽으실때는 '나'의 상황과 환경에 맞춰 일종의 '코딩'작업이 필요합니다. 그 작업이 바로 '묵상', '분별', '기도', '생각' 등등 입니다.

이러한 작업을 거치지않고 성경의 문자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것은 '문자주의'라고하여 기독교 전통은 이런것을 이단으로 여겨왔습니다.

따라서 질문자님께서 성경을 읽으시면서 이것이 내게 주시는 하나님의 말씀인지 알고 싶으시다면 단순히 마음의 찔림으로 판단하는 것은 아닌듯 보입니다..^^ 해당하는 그 말씀을 묵상해 보시고, 깊이 생각도 해보시고, 생각속에서 적용도 해보시고, 기도도해보시면서 판단하셔야합니다!

그리고 이러한 과정에서 자칫 나의 생각이나 묵상이 성경전체를 흐르고있는 복음적인 맥락을 벗어나지는 않는지 또한 주의하셔야할듯 합니다!]]></description>
			<author><![CDATA[숲지기]]></author>
			<pubDate>Mon, 20 Jan 2025 12:59:07 +0000</pubDate>
			<category domain="https://saengcrim.com/?kboard_redirect=1"><![CDATA[익명 Q&A]]></category>
		</ite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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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CDATA[1:1 문의]]></title>
			<link><![CDATA[https://saengcrim.com/?kboard_content_redirect=322]]></link>
			<description><![CDATA[성경을 읽으면서 하나님이 나에게 말씀하시는건지 어떻게 알수있나요?? 마음의찔림으로 알수있는건가요?]]></description>
			<author><![CDATA[박질문]]></author>
			<pubDate>Mon, 20 Jan 2025 08:58:34 +0000</pubDate>
			<category domain="https://saengcrim.com/?kboard_redirect=1"><![CDATA[익명 Q&A]]></category>
		</ite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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